"맏형을 대신해 16살에 총을 들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왔지만 둘째와 셋째형은 전사했더군요. 유해도 없이 전사통지서만 덩그러니 남아 있더군요."
23일 오후 대구 남구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6'25전쟁 당시 16살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류형석(77) 씨를 만났다. 옅은 숱의 흰머리에 짙은 주름살이 잡힌 류 씨는 굳은 목소리로 전쟁의 아픈 기억을 생생히 기억했다.
대구농림중학 2학년에 다니던 류 씨는 1950년 당시 경북 선산군에 살았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뒤 마을을 비우라는 군 명령이 떨어지자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경북 영천군 화산면 큰 개울가에 피란민들이 집결했다. 그곳엔 청년방위대 초소가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 입영시켰다. 8월 어느 날 20살이던 셋째형(류원석)이 징집됐다. 다음날엔 결혼한 29살의 맏형(류윤석)이 방위대에 끌려갔다.
류 씨는 "장남인 형이 아내와 딸이 있어 전쟁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제 때 일본의 징용병에 잡혀간 경험도 있는 형을 다시 전쟁에 보낼 수 없어서 방위대를 찾아가 내가 형 대신 전쟁에 나가겠다"고 설득했다. 방위대 입장에선 징집 숫자를 채우면 됐던 터라 쉽게 허락했다.
형을 대신해 겪은 전쟁은 참혹했다. "시체들이 산을 덮었고 무참히 일그러진 모습이었지. 주위에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고 식사 땐 흰 밥덩이에 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었지."
죽을 고비도 넘겼다. 50년 11월 말 평안북도 태천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기습공격을 받아 후퇴할 때였다. "무전기를 둘러메고 들판을 가로질러 갈 때 뒤에서 총소리가 나고 앞에선 우박 떨어지듯 실탄들이 꽂혔지.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어.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갔고, 죽은 나를 가족들이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지."
류 씨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 전 10월 26일에 셋째형은 스무 살의 나이에 전사했다. 류 씨는 그 소식을 2년 4개월 만에 나온 첫 휴가 때인 52년 11월 말에야 알았다. 둘째형(류장석)이 입영장을 받고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분하고 화가 났다. 셋째형이 전사한 상태였고 나도 복무 중인데 굳이 둘째형까지 전쟁터로 불러들여야 했나 한탄스러웠어."
끝내 둘째형도 돌아오지 못했다. 피란길에 낳은 아들(2)과 아내를 남겼다.
류 씨는 54년 6월에 만기제대하며 살아 돌아왔지만 전쟁은 이미 두 형을 앗아갔다. "유해도 없이 가슴에만 묻었다. 전장이었던 한반도 전체가 나에게 현충원일 것"이라는 류 씨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20살에 제대해 중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기는 너무 늦은 나이었다. 그래서 공무원 채용시험인 보통고시를 독학으로 합격해 56년 공직에 나섰다. 국세청에서 퇴직하고 현재는 서울에서 세무사로 일하고 있다. 올해 2월 '낙동강'이라는 8권짜리 6'25전쟁사를 썼다. 최근 경상북도와 육군3사관학교가 주관하는 '6'25전쟁 61주년 국제학술세미나'에 초대받아 대구에 들렀다.
류 씨는 "나와 같은 사연이 무수히 많다. 묻혀있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려야 한다"며 "그것이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준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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