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표해록, 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최부/보리

중국 제도·풍습 등 생생히…저자의 표류 역경도 담아

'배 안에서는 생사고락을 같이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함께 탔더라도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나라 사람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자.' -표해록 윤정월 10일.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네덜란드 사람 하멜의 '하멜 표류기'와 함께 근대 이전에 기록된 세계적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최부의 '표해록'을 읽었다. 15세기 말엽 우리나라와 중국의 제도와 풍습, 두 나라의 관계와 주변국의 상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자가 당한 고난과 역경이 감동적으로 서술된 '표해록'은 중국과 일본, 영어권에도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정작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던 기행문 '표해록'을 남긴 최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전과 역사에 밝고 문사에 뛰어나며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한데다 나라에 옳고 바른말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벼슬아치'로 평가받았던 최부는 훌륭한 선비이자 학자였다. 그는 34세에 제주도로 건너가 직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인 나주로 귀향하다가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된다. 그 후 간신히 중국 땅을 거쳐 우리나라에 돌아온 최부가 왕에게 지어 바친 글이 바로 '표해록'이다. 관리가 왕에게 바친 보고서인 셈이다.

기행문은 최부가 제주도에 부임하던 성종 18년(1487) 9월 17일 시작하여, 이듬해 윤정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를 떠나 고향집으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바다에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땅에 닿고, 양자강과 회하를 지나 황제가 사는 성에 들며, 마침내 요동벌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귀환하는 6월 4일 일기까지 이어진다. 말미에는 지나온 노정과 천연 지세, 중국의 물길 이용 제도, 살림살이와 옷차림새, 인정과 풍속까지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특히 그가 주의 깊게 본 것은 양자강의 운하로, 관찰한 것을 상세히 기록한다.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성정이 온화하고 유순하며 독서를 즐기는 강남 사람들과, 인심이 사납고 포악하며 문맹이 많은 강북 사람들을 비교하기도 한다. 엄청난 시련에 직면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그의 모습에서 조선 선비의 냉철한 지성을 엿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효심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문장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당시 최부와 함께 배 안에 탄 사람 중에는 하인이나 종을 포함해서 대부분 하류층으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막말을 하고 도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려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최부는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서 위기를 넘겼다. 해적을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로울 때에도 그는 조선 선비의 기개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학식이 높고 고사나 옛일에 넉넉한 지식이 있던 최부는 막된 사람에게도 인격적으로 감동을 주어, 어려울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면서 표류생활을 헤쳐 나갔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 반드시 의심을 살 것이니 언제나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하던 최부의 모습은 중국의 관헌들까지 감동시켜 마침내 중국 황제까지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홍문관 학사라는 이름에 부끄럼 없이 철저한 선비적 자세를 중국의 황제에게까지 인정받아 후한 상품을 받고 호위를 받으며 조국 땅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배에 탔던 43명 전원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최부의 인격과 학식,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 덕분이었다.

귀국 후 관리로 살아가던 최부는 연산군 시절 왕의 잘못을 알리고 고관대작들의 비행을 폭로한 상소를 올린 것으로 미움을 받아 끝내 처형당한다. 조선의 선비로서 지조와 절의를 지키며 한평생 곧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이후 중종은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당대의 학자이자 외손자인 미암 유희춘이 그의 책을 세상에 알렸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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