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을 앞둔 어느날. 한나라당은 대선 자금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궁리 끝에 나온 아이디어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보가 없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전세 신세였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마땅한 담보가 없으면 연대보증을 서 달라"고 요구했고, 당시 당 대표를 맡고 있던 강재섭 전 대표는 결국 도장을 찍어야 했다.
정당의 수장인 당 대표는 이처럼 당과 운명을 같이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당헌에 따르면 대표는 법적, 대외적으로 당을 대표한다. 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당직자 회의를 소집할 수 있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또 비서실장과 특별보좌역을 둘 수 있고, 최고위원회의의 의결을 거쳐 당 원로 및 사회지도급 인사 중에서 상임고문을 위촉할 수 있다.
최고위원회의의 의결을 거쳐야 하지만 사무총장, 전략기획본부장, 홍보기획본부장의 임명도 대표의 몫이다. 특히 사무총장은 당의 사무 전반을 관장하는 자리인 만큼 당 대표는 사무총장을 통해 당의 재정 및 인사 업무 전체와 관련한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한다.
이 같은 대표의 권한은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더욱 크게 발휘된다. 통상 선거 정국에서 공천심사위원장은 사무총장이 맡고 공천심사위원회의 결정은 최고위원회의의 의결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대표의 입김이 세질 수밖에 없다.
7·4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당 대표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종전에는 최고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지명직 최고위원 2명을 지명하도록 했으나 개정 당헌에서는 최고위원들과 협의만 하고 지명할 수 있도록 바뀐 것이다. 실제로 직전 지도부에서는 최고위원 간 이견 때문에 지명직 최고위원이 지난해 7월 전당대회 이후 무려 5개월간 공석으로 남아있기도 했다. 홍준표 신임 대표의 경우 사실상 최고위원회의에서 자신을 포함해 3명 몫의 의사결정권을 지니게 된 셈이다.
오는 11월 21일은 1997년 탄생한 한나라당 출범 14주년 기념일이다. 그 세월 동안 대표직을 지낸 정치인은 막 임기를 시작한 홍 대표를 포함해서 모두 11명이다. 조순, 이회창, 서청원, 최병렬, 박근혜, 김영선, 강재섭, 박희태, 정몽준, 안상수 씨가 차례로 맡았다.
최장수 대표는 이회창 전 총재다. 그는 1998년 4월 2차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후 2002년 4월 사퇴할 때까지 3년 8개월간 당을 이끌었다. 반면 임기가 가장 짧았던 대표는 김영선 의원이다. 김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의 사퇴 후 최고위원으로서 순번에 따라 대표직을 승계받아 2006년 6월19일부터 7·11 전당대회 직전인 7월 10일까지 '24일 천하'를 누렸다. 천막당사 이전 등 강도 높은 개혁 정책으로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평가를 받은 박근혜 전 대표는 2004년 3월 취임해 2006년 6월 대선 출마자의 사퇴 규정에 따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간 재임했다.
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강재섭-박희태-정몽준-안상수 순으로 4명이 대표직을 맡았다. 작년에 40일간 당을 이끈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과 이번에 대표 권한대행을 맡은 황우여 신임 원내대표까지 포함한다면 6명이다. 이 가운데 2년 임기를 모두 마친 경우는 강재섭 전 대표가 유일하다. 박희태 현 국회의장은 2008년 7월에 열린 10차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뒤 2009년 10월 재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사퇴했다. 이후 대표직을 승계했던 정몽준 전 의원은 9개월 만에 6·2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정 전 대표의 사퇴로 치러진 지난해 7·14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안상수 전 대표는 올해 4·27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다. 당 대표는 각종 선거에서의 패배 후유증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자리인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를 앞두고서 일부 대권 주자들이 당권과 대권을 분리한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 찬반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당권과 대권 분리는 1970년대부터 '뜨거운 감자'였다.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어쩔 수 없는 그늘이다.
한나라당에서 현행처럼 당권과 대권의 분리가 이뤄진 건 2005년 11월 당헌·당규 개정을 통해서다. 박근혜 전 대표 시절 만들어졌기 때문에 박 전 대표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준표 현 대표가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 주도했다. 당시 당 혁신위원장을 맡고 있던 홍 의원이 내놓은 혁신안은 당권·대권 분리와 9인 집단지도체제 도입, 대의원 20%, 당원 30%, 일반국민 30%, 여론조사 20%의 대선 경선룰 확정 등이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도 이회창 총재 시절이던 2002년 집단지도체제 도입과 국민참여경선제를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나라당을 탈당한 바 있다. 당권과 대권의 분리는 비주류의 '전매특허' 역할을 해온 것이다.
한나라당 역대 대표는 법조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회창, 김영선, 강재섭, 박희태, 안상수 전 대표에 이어 홍준표 현 대표 등 6명에 이른다. 한나라당이 '판·검사당' '법조인당'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만하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정당 때는 법조인과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많아 '육법당'으로도 불리었다.
한편 궐위된 대표최고위원의 잔여 임기가 1년 미만일 때에는 최고위원 선거 득표 순으로 최고위원이 승계한다. 대표최고위원이 사고·해외 출장 등으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원내대표, 최고위원 중 최고위원 선거 득표 순으로 직무를 대행한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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