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3)장삼철 씨의 의성 사곡

진한 마늘 냄새… 아! 고향이다

늡시골로 소먹이러 다니던 당시의 신작로. 지금은 산수유 가로수가 들어선 아스팔트 길이 됐지만 이곳을 거닐면 도열한 포플러 가로수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늡시골로 소먹이러 다니던 당시의 신작로. 지금은 산수유 가로수가 들어선 아스팔트 길이 됐지만 이곳을 거닐면 도열한 포플러 가로수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의성군 사곡면 신감마을 골목길 한켠에 어릴적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돌담길과 마늘 창고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의성군 사곡면 신감마을 골목길 한켠에 어릴적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돌담길과 마늘 창고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정삼철 씨
정삼철 씨

노래로도 만들어져 불리는 정지용의 시 '향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그리운 고향이 있을 것이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시절 마음껏 뛰놀고 꿈을 키우던, 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이 내게도 있다.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신감리. 이곳은 내가 태어나고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자란 곳이다. 지금은 산등성이 너머 있는 숲실마을이 '산수유 꽃 피는 마을'로 알려지면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예전의 사곡면은 밖으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의성마늘과 한때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했을 정도로 유명한 작약의 주산지이고 진상품이었다는 사곡시(숲실종 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붉은 작약꽃과 은은한 마늘향은 내 고향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소를 먹이러 다니던 늡시골은 우리 악동들의 아지트였다. 100호 가까이 되는 큰 마을이어서 소도 참 많았다. 오후 3시쯤, 신작로를 걸어 늡시골로 향해 소를 모는 아이들은 마치 김주영의 소설 '객주'의 행수(行首) 조성준이 이끄는 소장수들처럼 행렬이 길기도 길었다. 고삐줄을 목에다가 감거나 뿔에다가 감아 산에 풀어 놓으면 신기하게도 소들은 흩어지지 않고 떼를 이루어 서서히 움직이며 풀을 뜯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편을 갈라 말타기, 전쟁놀이, 씨름 등 각종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누가 빨리 와 보라고해서 우르르 몰려갔더니 뱀이 뱀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잡아먹고 있는 뱀은 능구렁이였고 잡아먹히고 있는 뱀은 너불대(꽃뱀)였다. 옛날 어른들 말씀에 능구렁이가 저녁에 노래를 부르면 온 동네 뱀들이 다 모여들고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놈을 잡아먹는다고 듣기는 들었지만 직접 뱀이 뱀을 잡아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른들 말씀대로 진짜 어떤 의식을 치르고 먹어 치우는지 장소도 풀숲이 아닌 평평한 바위 위에서였다. 가만히 지켜보니 2, 3분에 한 번 씩 머리를 쳐들 때마다 꽃뱀은 조금씩 빨려들었다. 꽃뱀이 들어간 만큼 능구렁이의 배는 배로 늘어나 있었다. 능구렁이는 사람을 만나도 원래 도망도 잘 가지 않지만 설령 도망을 가려고 해도 꽃뱀을 반쯤밖에 못 삼켰으니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와글대며 쳐다보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삼키고 있으니, 그래서 능청스런 사람을 보고는 능구렁이 같다고 하는가 보다. 우리가 뱀 중에 가장 만만하게 보는 능구렁이가 뱀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존재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두 세 시간 지나 해 빠질 때쯤 되니 꽃뱀은 꼬리도 보이지 않고 능구렁이 뱃속으로 다 들어갔다. 우리는 몸이 두 배로 늘어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꽝' 능구렁이를 그냥 줍다시피 해서 올가미에 목을 걸고 막대기에 달아서 개선장군처럼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어른 한 분이 값을 후하게 쳐준다고 해서 그 당시로는 꽤 큰돈을 받고 팔았다. 그 많은 소먹이꾼 아이들이 골고루 과자를 나눠 먹을 수 있었으니까.

일이 많이 벌어지기로는 물놀이 하는 곳을 빼놓을 수가 없다. 신작로 길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흘러가는 냇물은 상류라 넓지는 않았지만 웬만히 가물어도 마르지는 않았다. 그 내가 흘러가다 바위 절벽과 부딪혀 소(沼)가 만들어진 곳, 그 곳이 우리들이 즐겨 찾는 물놀이 장소였다. 역시 마을이 커서 아이들도 많았다. 베이비부머 중에서도 정점을 찍었다는 58년 개띠, 그보다 한두 살 적었던 우리들이었으니 동생들도 많았고 형 누나들도 많았다. 사내아이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발가벗은 채로 개미떼처럼 줄지어 바위 계단에 올라가 차례로 뛰어내리거나 다이빙을 했지만 여자애들은 저 아래쪽에서 그 당시는 발육이 늦어 뭐 가릴 것도 별로 없었건만 꼭 '빤쓰'도 입고 '난닝구'도 입은 채 따로 물놀이를 하였다. 상류라 물이 맑았고 바닥이 자갈이라 어지간히 아이들이 들어차서 물놀이를 해도 물은 쉬이 흐려지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발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물에 굴절되어 짧아진 다리에 새끼 피라미들이 달려들어 간질이곤 했다. 그러다가 때를 밀기라도 하면 고기들이 떼로 몰려든다. 고기들은 사람의 때를 엄청 좋아한다. 홍수가 지고 황톳물 색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참지를 못하고 냇가를 찾아 멱을 감기로 했다. 아직 물살이 세어서 저 건너 바위 계단에 건너가려면 떠내려가면서 헤엄을 쳐야하기 때문에 위쪽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 용감한 도환이가 먼저 건넜다. 도환이가 건너는 걸 보고 스스로의 헤엄 능력을 생각해서 각자 출발 위치를 잡는다. 일곱 명 모두 다 건넜다. 역시 용감한 도환이가 먼저 다이빙을 했다. 그런데? 꽤 높은 곳에서 물속으로 꽂혀 들어갔는데 어째 쏙 들어가지 않고 엉덩이가 물 밖에 그대로 보이는지. 큰일 났다! 잠시 후, 떠내려가던 도환이의 머리가 올라오는데 피투성이다. 다행히 도환이는 정신을 차려 스스로 헤엄을 쳐 건넜다. 우리 모두도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건넜다. 머리를 보니 많이 깨지지는 않았다. 도환이는 맨땅에 헤딩을 했던 것이다. 바닥에는 칼돌이 있었나보다. 그 칼돌에 머리가 찍혀서 깨지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홍수가 지면서 우리가 다이빙을 하던 깊은 곳은 메워져서 배꼽까지의 깊이밖에 안 되었다. 큰물이 질 때마다 바닥깊이가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 어려서 몰랐던 것이다. 그날 도환이의 머리에는 된장이 발라지고 헌 난닝구를 찢어 감아 고호의 '귀 잘린 자화상'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게 많았는지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었다. 아이들이니까 당연히 그랬겠지만. 한번은 늡시골에 소 먹이러 갔다가 소가 헤엄을 칠 줄 아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우리들은 '헤엄칠 줄 안다'와 '모른다'가 반반 갈려 우기기를 계속하다가 결국 한 아이네의 소를 못에 밀어넣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못둑에서 소를 밀어넣으려고 대여섯 명이 낑낑거리며 힘을 써 봤자 소는 요지부동이었다. 우리들은 머리를 짜내어 소를 산 쪽 경사가 급한 곳으로 몰고 갔다. 거기서 소를 세우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영차영차! 하며 소를 못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조금 조금씩 밀려들어가던 소도 포기를 했는지 풍덩하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무래기들한테 떠밀려 물에 빠진 소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소는 여유 있게 머리를 쳐들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덩치에 비해 발바닥도 작고 물갈퀴도 없는데 어찌 그리 헤엄을 잘치던지. 하긴 헤엄 못 쳐 물에 빠져 죽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나. 또, 우리들은 뱀하고는 무슨 원수가 졌는지 뱀을 만나면 도대체 가만 두지를 않았다. 독사나 능구렁이는 잡으면 팔거나 구워먹기나 하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꽃뱀을 만나도 바로 때려죽였다. 꽃뱀은 죽을 짓을 스스로 사서(?)하기도 한다. 이놈은 독도 없으면서 사람을 만나면 코브라처럼 대가리를 바짝 세우고 노려보며 혀를 날름거리기도 한다. 제 딴엔 놀라서 위협을 가한다고 그런 폼을 잡지만 이미 만만한 상대임을 아는 우리에게 걸리면 괘씸죄만 더 적용될 뿐이었다. 꽃뱀을 작대기로 두들겨 패다보면 배가 터져 알이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잡아당기면 줄줄이 사탕처럼 연결돼 줄줄 나온다. 뱀알은 하얀색으로 껍데기가 말랑말랑한 게 작지만 누에고치처럼 둥글게 생겼다. 우린 그 알까지도 밟아 터뜨렸다. 나중에 알에서 새끼가 나와서 보복하러 올까봐.

신감마을에서 초등학교가 있던 면소재지까지는 신작로가 지나고 있었다. 우리들의 학교길이기도 했던 그 길은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2㎞ 정도는 똑바른 길이었는데, 비포장 길에 아름드리 포플러 가로수가 양쪽으로 도열한 모습은 참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하얀 길과 파란하늘이 대각선을 이루어 멀리 소실점이 아물거리고, 그 사이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코로나 택시라도 한대 지나가면 완전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이제 그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고 포플러 가로수는 진작에 없어졌지만 한적한 그 길은 그대로 남아있다. 사곡면에서는 12년 전에 그 길 양쪽으로 산수유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 가로수 길이지 싶다. 몇 년 후 나무가 더 많이 자라고 봄 전령인 산수유 꽃이 만발하면 인근 숲실 산수유마을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을 것 같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길 이상의 명소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살아 갈수록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특히 어릴 적 산과 들로 뛰어놀던 그 때가 참 그립다. 산등성이에는 소 풀 먹이는 아이들, 냇가엔 멱 감는 아이들, 천렵하는 아이들. 소꼴 베는 아이들, 시오리 신작로 길은 등하교하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모두다 어딜 갔는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나는 큰 행운으로 여긴다. 내 마음이 늘 밝은 것도, 느낌이 넉넉한 것도, 건강한 영혼을 지닌 것도 다 아름다운 고향을 둔 덕분이리라. 생각하면 할수록 참 고마운 일이다.

(운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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