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편지

꽃처럼 그는 갔다

들판에 서서 가슴이 뻐근하다

깊고 빠르게 젊음이 지나가고

마음 한 가닥 나뭇가지에 걸린다

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그의 숨결임을 알겠다.

그 숨결이 꽃으로 피고

꽃의 향기가 가슴을 저민다

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의

서늘한 여백이 그의 연서였음을 알겠다

행간에 서린 그늘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가지에 묻어 있는 물기가

그의 눈물 자국이었음을 짐작한다

펼쳐 든 편지 위로 마침표도 없이

지나간 청춘의 끝이 가물거리고

들판에 혼자 서서 이제야 알겠다

그는 내 마음의 들판에

단단하게 박힌 돌, 언제나

가슴이 뻐근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이진흥

 '헤어진 연인을 잊는 데 걸리는 시간은?' 뭐 이딴 걸 조사한 기관도 있다지만 그런 질문은 애당초 신빙성이 없어요. 사랑은 양과 질과 정도가 각양각색이어서 물리적 척도로는 환산 불가하죠.

 이별한 사람 있다면, 이별의 기억 때문에 아픈 사람 있다면, 편지 대신 김영갑의 삶과 함께 그의 사진을 내밀어 볼래요. 바람 부는 제주의 나무, 머리 풀어헤치고 마지막 혼절하는 나무를 보여줄래요. 셔터 누르는 손가락이 떨려 카메라를 잡지 못하는 절명의 순간들, 바람의 냄새를 다 기억하고 있는 나무들. 슬픈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고 위로해 줄래요.

 꽃처럼 간 그, 스치는 바람이 숨결이고, 서린 그늘이 눈물이며, 서늘한 여백 아직 그를 밀어내지 못한 자국이겠어요. 아뿔싸, 가슴 뻐근한 이유는 그가 단단히 박힌 돌이라니요. 아름다워라, 시인의 젊은 시절을 적셨을 이 편지. 지금은 아득히 밀려나 한 송이 꽃이 되었을 아련한 이야기 한 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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