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가 휩쓸었다.'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막일 매일신문 1면 제목이었다. 대회 첫 경기 종목으로 치러진 여자 마라톤에서 금, 은, 동메달을 싹쓸이한 케냐 여자 선수들의 이야기다. 아직은 국민소득 800달러의 빈국(貧國)인 케냐가 21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올림픽을 비롯해 전 세계 마라톤 대회를 휘어잡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2000년 LA 국제마라톤에서는 1~5위를 싹쓸이했고 세계기록 상위 10위 기록 중 7개는 케냐 선수들이 수립했다. 그것도 1, 2명의 뛰어난 선수가 겹치기로 수립한 기록이 아니라 7명의 선수가 각자 세운 기록들이다. 스타급 선수들이 고루고루 포진하고 있다는 얘기다. 직전 베이징 올림픽(2008년) 마라톤 금메달도 케냐 선수 목에 걸렸었다. 그리고 그저께 대구에서 또 한 번 케냐가 70억 세계인의 환호와 부러움을 샀다. 대회 마지막 날 남자 마라톤에서 또 한 번 케냐의 국기가 펄럭일지 두고 볼 일이지만 '아마도'를 넘어 '거의' 그들 차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가난에 의한 미성년 아동 성 학대 문제가 세계 뉴스로 방영될 정도의 빈국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건각들이 10년 이상 계속 이어져 태어나는 비결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 연구가들은 케냐의 지리적 환경과 신체적 조건을 먼저 꼽는다. 해발 1,800~2,400m 고지대는 핏속의 적혈구를 늘리고 유산소 능력이 향상돼야 적응되는 환경이다. 자연에 순응하려다 보면 폐활량 같은 지구력 증강 쪽으로 몸이 바뀐다. 거기다가 어릴 때부터 대부분 맨발로 생활한다. 교육환경이 좋지 않으니 학교도 3~5㎞ 이상 멀리 떨어져 매일 등하교 때 야산과 들판을 뛰고 걸어야 한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세계를 제패하는 비결에 대해 케냐 육상을 연구하고 있는 '스위스 러닝'(Swiss Running) 잡지사나 덴마크 연구소는 1차로 신체 구조와 식생활을 꼽았다. 케냐 사람의 하체 근육량은 유럽인들보다 12%나 적다고 한다. 다리는 길되 종아리가 가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소 소비량이 80% 수준으로 절약된다. 거기다 케냐 사람들의 주식은 탄수화물이다. 하루 필요 열량의 76%를 탄수화물로 섭취한다. 미국이나 유럽 선수들의 40~45% 수준밖에 안 된다. 옥수수를 반죽해서 쪄먹는 '우갈리'와 감자, 콩, 양배추 같은 거다.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은 전통 차도 마신다. 달리는 데 필요한 주 에너지가 되는 글리코겐을 근육 속에 최대한 저장할 수 있게 해주는 음식들이다.
그렇다면 지구촌에 해발 2,000m 안팎이고 탄수화물 중심의 곡물을 주로 먹으면서 산악 지대를 거칠게 뛰어다니며 생활하는 종족이 케냐인뿐일까. 중국 소수민족 속에도 있고 아프리카 중남부, 중남미에도 비슷한 환경의 나라와 종족은 수두룩하다. 케냐의 경우도 스타 마라톤 선수의 75%가 40종족 중 주로 칼렌진 종족에서 배출됐다. 환경적 요소뿐 아니라 그 지역이나 그 종족 나름의 정신적 지향점과 집중된 목표가 있는 문화적 분위기가 더 중요한 숨은 비결임을 말해준다. 빈곤 속의 케냐 아이들은 정치인 다음으로 인기 있는 스타 육상 선수를 멘토 삼아 자라면서 그런 정신력과 목표를 다진다.
'인간은 똑같다. 신체 구조나 사회, 문화적 요소는 과학의 힘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다. 스포츠는 정신력이 실력의 75%를 차지한다.' IOC 위원인 케이노 위원의 이 말이 마라톤 왕국 케냐의 비결을 대변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자이며 런던, 시카고 마라톤을 연이어 제패했던 케냐의 마라톤 영웅 완자루(25)가 지난 5월 여자 문제 등으로 자살한 것도 '정신'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정치인 다음으로 최고의 성공을 가져다주는 마라톤에 인생을 거는 목표 의식과 그 목표를 향한 '헝그리 정신'이 바로 진정한 케냐 마라톤의 비결인 셈이다. 그 정신력이 흔들리면 세계적 스타도 자살의 길을 걷는다.
육상이 뒤처지는 한국은 어떨까. 체격 좋고 육상 자질이 보여 선생님이 육상부에 넣어두면 이튿날 학부모가 득달같이 달려와 '우리 아이 빼주세요' 하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인기 없고 돈 안 되는 종목에 우리 애는 안 보내겠다는 '분위기'와 출세 지향적 교육 풍토에서 한국 육상의 꿈나무를 길러내고 세계적 스타를 대거 배출한다는 건 그야말로 아직은 꿈일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뛰고 있는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성원한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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