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로 연명하며 보릿고개를 넘겨왔던 배고픈 과거 덕분인지 우리 문화 속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속담이 유난히 많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으며' 먹을 때는 뭐도 건드리면 안 된다. 먹는 행위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강조하는 속담을 접하다 보면 어떤 때는 맘이 짠하기도 하다. 먹는 게 미안해 저승의 귀신까지 동원해야 했던 옛 사람들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잘 먹는 것은 만사의 근본 중 하나이다. 힘든 일로 끙끙거리다가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며 밥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그럭저럭 마무리 지을 힘이 생겨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온 나라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무상급식 논쟁도 정치적 이해관계나 찬반 여부를 떠나서 본다면 편한 맘으로 밥 먹고 바르게 자라도록 하자는 취지가 출발점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잘 먹는 경지를 넘어서 온 나라가 식탐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떻게 먹는 것이 '잘 먹는 것'인지 함께 돌아봐야 할 시점을 이미 멀리 지나쳐 왔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TV나 인터넷을 통해 '잘 먹는 것'에 대한 정의가 거의 매일 경향 각지로 전파되고 있다. 수많은 주인장이 갖가지 재료들을 옥상옥으로 쌓아 이것이야말로 별미라고 내어놓으며 경쟁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온갖 재료 듬뿍 넣어 배 터지게 먹는 것이 잘 먹는 것'이라는 식탐의 부추김이다.
이들이 내놓는 '맛있는 음식'에서는 재료 고유의 맛, 먹을거리에 대한 고마움, 건강에 대한 고민과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얼마나 귀한 재료들이 얼마나 푸짐하게 또 얼마나 신기하게 요리되었는가만 중요할 따름이다.
얼마 전 한 TV 프로에서 대나무가 유명한 고장에서 개발했다는 음식을 보여주는데, 굵은 대나무를 반으로 잘라 널찍한 마디마디에 각각 전복, 오리, 문어, 닭 등을 가득 채운 요리였다. 주인장이 어깨에 메고 날라야 하는 음식 길이에 아연실색하고 있는데 식당 손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렇게 먹어줘야 건강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다고 신명나게 증언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삼계탕만 먹으면 더 이상 보양식이 아니다. 전복 한 마리 정도는 얹어줘야 한다. 대표적 서민 음식 수제비에도 낙지 한 마리는 들어가야 하고, 시장의 보리밥집도 설탕 가득 든 식혜와 기름 듬뿍 두른 부침개 하나는 내놓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핫도그나 토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예닐곱 가지 소스가 범벅이 되어야 주인장이 성의 있다고 여긴다. 이것저것 넣다 보니 요즘의 1인분 양은 옛날과 비교해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달 초 발표된 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 성인 비만율(30.5%)은 OECD 국가 중 1위인 미국(33.3%)과 맞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서구화된 식생활을 비만 증가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으나 나는 그에 못지않게 먹을 것에 지나치게 관대하고 탐닉하는 최근 사회 분위기도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서양 음식이건 우리 음식이건 이것저것 많이 먹게 되면 문제가 된다. 음식과 약은 그 뿌리가 다르지 아니하고, 잘못된 식습관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되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온다.
남의 나라 사례이긴 하지만 미국의 경우 전국적으로 국민 식사량을 조사해 전년도와 비교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며 보건 정책의 기초 자료로 삼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해 보인다.
이젠 먹을거리의 종류나 영양소뿐 아니라 한 끼 식사량에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자고 제안한다. 푸짐한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에도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은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섬뜩하리만큼 현명한 말이다.
양정혜(계명대 교수·광고홍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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