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5부-소통과 변화의 수용 <2>동화로 세상과 소통한 권정생

선생은 한평생, 외로웠지만…세상은 그의 따뜻한 시선을 기억한다

뭇 존재를 사랑한 나머지 강아지똥,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자리한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을 찾았다. 속살 오른 주렁박과 누렁소의 게으른 울음소리를 벗 삼아, 돌담 사이 200m 시골길을 걸어 들어갔다. 빌뱅이 언덕 아래 위치한 여덟 평 오두막. 그가 1983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보금자리는 주인을 닮아 외로웠다. 마당엔 이름 모를 풀이 성겨 자라 있고 슬레이트 처마에 벌이 둥지를 틀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작가가 살던 집이 방치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단견이었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kcfc.or.kr)의 글을 보자.

'누구든지 여기에 오시려거든 외로움이 무엇인지 배우려고만 오시기 바란다. (중략) 행여 마당의 풀이 마음 쓰여 베려고 하거나 굳이 청소를 하려 들지는 말길 바란다. 마당에 자라는 풀들은 선생이 기르시던, 아니 놓아두고 보시던 것이거나 약용으로 쓰던 것들이다. (중략) 그저 조용히 그들의 외로움을 느끼고 당신의 외로움을 매만지기만 하길 바란다. (중략) 여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외로운 곳이라고 여긴다면 당신의 외로움은 얼마간 위안을 얻을 것이다.'(글 안상학)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다

생전의 권정생은 "작가는 모름지기 외로워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고독과 고통에 몰입했다. 인근 교회 문간방에서의 16년간 종지기 생활을 마치고 정착한 오두막에서 그는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습니다. (중략) 옷도 속옷, 겉옷 필요없이 자루처럼 하나만 입고 음식도 하루 세 끼는 너무 많습니다. 한 끼만으로 살 수 있게 그리고는 잠들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습니다.'

권정생은 모든 것들의 고통과 불행을 한몸에 지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길에 떨어진 강아지똥도, 이름 모를 들꽃도 사랑했다. 어떠한 불행과 아픔도 동정의 눈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바라보며 괴로워했다. 그의 동화에는 짓밟힌 사람들의 삶의 진실이 있다. 천대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참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과 얼마나 통하는 세계인가가 녹아 있다. 때로는 궁상맞고 서글프지만 그의 동화는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씻어준다.

◆화평의 세상을 염원하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5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해방 후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가난과 전쟁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청소년기와 20대 권정생은 상점 점원, 고구마 장수를 전전했으며 한때 걸인 생활을 하는 등 간난신고의 삶을 살았다.

망국의 설움, 전쟁의 상처, 병마의 고통이 그의 삶을 관통했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몸을 해쳐 전신결핵을 앓았고 1966년부터는 한쪽 콩팥과 방광을 드러내는 수술을 받고 평생 인공신장을 차고 혼자 살았다.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 병고와 외로움은 역으로 그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케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그의 작품에는 가련한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스며들어 있다. 그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 땅의 민초들을 글로, 자신의 삶 자체로 위무했다. 그는 '좋은 동화 한 편은 백 번 설교보다 낫다'고 했다.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가 죽겠습니다.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권정생, 1973년 2월 8일)

◆아낌없이 주고 가다

권정생은 동화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대표작 '강아지똥' '몽실언니'를 비롯해 단편동화 140편, 장편동화 5편, 소년소설 5편, 동시'동요 100여 편, 산문 150여 편을 남겼다.

그의 작품에,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그의 오두막을 찾았다. 권정생은 그러나 가족이나 객이 찾아오면 집 근처 수풀 속에 숨곤 했다. 육신의 고통이 너무 심해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서는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중략)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모두한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아름다운 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요.'(2007년 3월 31일 쓴 유언장 중에서)

유언장을 쓴 날로부터 47일 뒤(2007년 5월 17일) 권정생은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 속에 귀천(歸天)했다. 그의 유해는 오두막 뒤 야트막한 빌뱅이 언덕에 뿌려졌다. 2009년 1월 7일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됐다. 생전에 교분이 깊던 최완택 민들레교회 목사가 대표이사를, 이현주 목사(동화작가) 등이 이사를 맡았다. 안동시 명륜동 317의 1번지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는 유품전시관도 있다. 유언장 원본과 육필 원고, 성경책, 책상 등 선생의 체취를 담은 유품들을 볼 수 있다.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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