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꺼지고, 갇히고, 멈추고… 일상생활 'OFF' 분노 'ON'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전으로 승강기에 갇히는 시민들이 속출했다. 승강기에 갇힌 시민을 구출하는 모습. 대구소방안전본부 제공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전으로 승강기에 갇히는 시민들이 속출했다. 승강기에 갇힌 시민을 구출하는 모습. 대구소방안전본부 제공
정전사태가 벌어진 15일 오후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앞 네거리에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자 차량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정전사태가 벌어진 15일 오후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앞 네거리에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자 차량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15일 오후 대구시내 한 영화관 직원들이 정전사태로 영화 상영이 중지되자 관람객에게 요금을 환불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15일 오후 대구시내 한 영화관 직원들이 정전사태로 영화 상영이 중지되자 관람객에게 요금을 환불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전에 산업현장과 도심, 농촌을 가리지 않고 피해가 속출했다. 산업단지 내 공장들은 갑작스레 기계가 멈춰선 탓에 오작동으로 인한 불량품이 쏟아졌고, 기계 고장마저 잇따랐다. 도심 신호등이 꺼지고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는가 하면 에어컨과 선풍기가 꺼지는 바람에 시민들은 찜통 더위 속에 속수무책이었다. 전력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정부 때문에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 성서산업단지만 피해액 최소 200억원

15일 성서산업단지 내 업체들은 오후 3시11분부터 단 30분의 정전이었지만 갑작스런 전력공급 중단으로 기계 오작동과 불량 생산, 원재료 손해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삼보모토스는 이날 30분간의 정전으로 1천만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이재하 대표는 "한전에서 미리 정전을 예고했다면 대비책이라도 마련했을 것 아니냐"고 답답해 했다.

희성전자도 이날 오후 5시30분 갑작스런 정전이 발생했다. 아크릴판 사출 라인은 원재료가 기계에 그대로 멈춰선 탓에 재사용도 불가능해졌다. 회사 관계자는 "단 30분간의 정전이지만 피해액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라며 "무엇보다 이번 정전으로 주간 공정라인도 연장 근무를 해야 해 직원 스트레스도 크다"고 말했다.

16일 대구성서산업단지관리공단에 따르면 2천600여 개의 입주 업체 중 80%에 가까운 업체들이 정전 피해를 입었다. 한전에서 사전 통보없이 전력공급을 중단하는 바람에 단 한 곳도 대비하지 못했다.

특히 24시간 기계를 가동해야 하는 섬유업체의 피해가 컸다. ST원창은 직기 300대가 정전으로 멈춰서면서 기계 고장까지 발생했다. 이곳 관계자는 "섬유기계는 한 번 멈추면 다시 가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주말이나 휴일도 없이 기계를 돌리는데 이번 정전으로 모든 기계가 멈췄다"며 "원단 불량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이 수천만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성서공단 김락현 업무부장은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업체당 최소 1천만원에서 많게는 4천만원까지 피해를 입었다"며 "2천여 개 업체의 전체 피해액은 최소 20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중소기업 조업 차질

포항철강공단에는 이날 전기공급이 끊기면서 조업에 차질을 빚었으나 다행히 포스코 등 대기업들은 자가 발전기를 가동, 큰 피해를 막았다. 하지만 포항철강공단 내 60여 업체들은 일시적으로 전력공급이 끊기면서 조업에 차질을 빚어 피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포항철강관리공단 관계자는 "200여 개 입주업체 중 60여 개가 정전 피해를 입어 현재 피해 규모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미국가산업단지 4단지와 고아농공단지, 산동농공단지에 입주해 있는 50여 개 업체들은 적게는 500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구미국가산단 4단지 제원화섬의 경우, 정전 피해액이 수십억원에 이른다. 대기업들은 비상전력이라도 갖췄지만 중소기업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당했다. 구미시 장천면 대마실업 관계자는 "칩에 열을 가해 액체로 만들어 실을 뽑아내는 데 정전으로 열을 가할 수 없어 노즐이 굳어버려 불량이 발생했다"며 "복구하는 데 3, 4시간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에 3천만원 가량 손해를 입었다"고 털어놨다.

경산산업단지 내 입주 업체 등 각종 공장에서도 기계 작동이 멈춰 조업차질을 빚었다. 경산산업단지관리공단 장영환 전무는 "어제 오후 사무실로 '사전 예고도 없이 왜 정전이 됐느냐'는 문의가 잇따랐다"며 "조업 차질에 따른 피해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도의 한 팽이버섯 업체는 버섯 재배사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온도에 민감한 버섯의 품질 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풍각농공단지 업체들도 정전사태에 당황스러워했으며, 한 제조업체는 PE압출기 가동이 중단되면서 생산이 멈췄다. 고령 개진과 쌍림농공단지 입주업체를 비롯한 중'소 영세공장의 조업도 중단됐다.

◆ 승강기 멈추고, 신호등 꺼지고

회사원 김지훈(27'남구 대명동) 씨는 15일 오후 난생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고를 당했다. 이날 3시 30분쯤 회사 건물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덜컹' 소리를 내며 멈췄고 혼자서 40분을 견뎌야 했기 때문. 김 씨는 "혼자 갇혀 있어서 무섭기도 했지만 엘리베이터 안이 찜통이 돼서 죽는 줄 알았다"며 "휴대전화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면 좁고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버텼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구소방안전본부에 따르면 15일 오후 3시30분쯤 대구 달서구 한 모텔에서 엘리베이터 구조 신고가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오후 8시까지 모두 131건의 신고가 들어와 시민 299명을 구조했다.

전기가 끊기자 신호등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15일 오후 3시50분부터 대구시내 신호등 1천350개 중 181개가 꺼져 경찰이 수신호로 교통 상황을 정리했다. 직장인 장모 (36) 씨는 "오후 5시쯤 달구벌대로를 달리는데 신호등이 꺼져서 한동안 차들이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포항시 북구 우방신천지 아파트 주민과 오천읍 우방신세계 아파트 일부 주민들이 엘리베이터에 갇혀 소방서가 긴급 구조에 나섰으며, 포항시청 엘리베이터도 갑자기 멈춰 민원인들이 갇히는 소동이 빚어졌다. 롯데백화점 포항점도 오후 5시 35분쯤 정전이 돼 매장 내 전등과 에스컬레이트가 멈춰 고객들이 놀라기도 했다.

구미 시내 지역 고층 빌딩에서는 엘리베이터에 갖히는 사고가 16건이 발생해 구미소방서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경산시 중산동 글로벌체육센터 건물 내 승강기 안에서 김모(42'여) 씨와 아들 황모(3) 군 등 모자가 갇혀 있다가 119구조대에 의해 구조되는 등 이날 경산에서만 6건에 시민 8명이 승강기에 갇혔다 구조됐다.

청도 화양읍 대형 온천은 탕에 물 공급이 끊기면서 고객들이 항의하다 탕내에서 기다리는 소동이 벌어졌고, 청도 와인터널에도 전기가 끊기면서 터널 안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고객들이 놀랐다.

◆ 일상생활도 마비

컴퓨터 전원이 나가 기업 입사원서 마감시간을 놓쳐버린 이들도 있다. 취업준비생 이모(26'여) 씨는 "꼭 가고 싶었던 기업의 입사서류 마감이 15일 오후 5시였는데 오후 4시 20분쯤 갑자기 컴퓨터가 꺼졌다"며 "노트북을 들고 전기가 들어오는 장소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전기를 끊은 한전이 내 취업까지 책임질 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한전이 지역별로 전기 공급을 차단하는 바람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 간에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경북대 동문에서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이희승(27'북구 산격동) 씨는 "갑자기 에어컨이 꺼지고 불이 나가 더위에 지쳐 가게를 떠나는 손님들이 많았다. 에스프레소 기계까지 작동을 멈춰 당황했다"며 "그런데 건물 맞은편 카페는 동구 신암동이라서 그런지 전기도 잘 들어오고 손님도 많아 어이가 없었다"고 불평했다.

약국도 찾아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느라 큰 피해를 봤다. 컴퓨터가 꺼져 전산 처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처방전을 들고 찾아온 손님들은 죄다 되돌려보낸 것. 동구 신암동 파티마병원 인근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한 약사는 "컴퓨터가 꺼지면 처방전에 나와있는 약값을 몰라 약을 조제하더라도 계산을 할 수 없다. 손님들에게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달라고 하기도 부탁할 수도 없어 30분 넘게 장사를 못했다"고 털어놨다.

한마디 예고도 없이 전기 공급을 차단한 한전 측에 울분을 토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자동차정비공장을 운영하는 정열현(51'달서구 유천동) 씨는 "자동차를 손보고 있는데 오후 4시50분쯤 갑자기 전기가 나가서 한전에 전화를 해서 따졌고, 강하게 항의하니까 10분 만에 다시 전기가 들어오더라"며 "한전에서 최소한 예고라도 하고 정전을 했다면 시민들이 대비라도 했을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농작물 피해

영양지역에서는 정전사고로 영양고추유통공사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물에 잠겼던 일부 홍고추들이 무르는 등 피해를 당했다. 대부분 고추 농가들도 한창 고추 말리기 작업을 위해 가동하던 벌크가 갑자기 중단하면서 한전과 벌크 제조사 등에 문의하기도 했다.

예천지역에서도 정전으로 수확을 앞둔 농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상리면 김규하(65) 씨는 "최근 고추 수확을 앞두고 판매를 위한 건조 작업이 한창인데 갑자기 정전이 돼 깜짝 놀랐다"며 "하마터면 정성들여 지은 한 해 고추농사를 다 망칠 뻔했다"고 말했다.

딸기모종 정식을 끝낸 고령 쌍림면 내 일부 딸기농가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이 밖에 경주, 안동, 문경, 영주, 의성, 영덕, 울진 등 경북지역 곳곳에서 정전으로 인한 불편이 잇따랐다.

사회1, 2부, 경제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