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 시험일은 11월 18일입니다.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수험생이 있으면 온 가족이 일 년 내내 긴장합니다. 가족 나들이 한번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텔레비전도 제대로 못 켭니다.
아이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짜증 내고, 성적에 낙담해 한숨 쉬며,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 합니다. 부모는 애간장이 탑니다. 이해도 못할 입시 용어에 무력감을 느끼고, 남들 다 한다는 과외도 제대로 못 시킨 것 같아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저 깊이엔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를 기쁘게 하고픈, 자녀를 행복하게 만들고픈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짜증스럽고 화날지라도 참고 또 참으며, 되레 그 짜증과 화가 제 탓이라고 돌립니다.
권동진 씨의 글 '고3 아비'는 땟국이 줄줄 흐르는 고3 딸의 운동화를 씻는 아버지의 담담한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고3 자녀가 아니더라도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작은 마음을 선물하면 어떨까요? 작지만 뭔가 해줄 수 있어 기쁘고, 그 수고로움의 대가조차 바라지 않는 마음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 부모가 되면 알 겁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고3 아비
운동화를 씻는다. 신발 옆구리를 가로지른 유명 상표며 분홍색이 무색할 정도로 찌든 때가 켜켜이 쌓여 있다. 단단히 매여진 끈을 풀고 내피를 끄집어내니 잉크처럼 선명한 발가락 자국이 찍혀 있다. 잠시 손길을 멈추고 판화처럼 각인된 자국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아! 내 딸도 이만큼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하다.
아무렴 고3이라는 멍에가 얼마나 힘들까? 감기약을 먹으면서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절박함이 오죽할까. 멈추지 않는 잔기침이며 푸석푸석 부은 얼굴을 지켜보는 마음이 안타깝다.
안타까움에도 무엇 하나 온전히 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고3 아비라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해 과외도 못 시키고, 아내는 부업을 다니느라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래, 신발이라도 깨끗이 빨아주자.
세탁비누를 듬뿍 묻혀 빨래 솔로 신발을 문지른다. 땟국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신발끈을 비벼 빨고, 밑창에 접착제처럼 붙은 껌을 떼어낸다. 몇 번의 헹굼 과정을 반복하니 본래의 분홍색이 살아난다. 마음이 개운하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지만, 고3 딸의 마음속 찌꺼기들도 이렇게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리를 펴고 한숨을 돌린 다음 바람과 볕이 잘 드는 베란다 창틀에 가지런히 신발을 말린다. 창틀 끝에 매달린 햇살이 아쉽다. '어서 축축한 뒷굽을 말려야지'하는 생각과 달리 서둘러 비껴가는 햇볕이 야속하다. 나만의 서두름과 조바심이 발동한다.
사람도 가끔은 묵은 땟국을 빼고 젖은 몸과 마음을 말리는 침묵의 의식이 필요하리라. 기울어가는 햇살을 따라 가을향을 머금은 바람이 노크도 없이 달려들어 와락 안긴다. 오래 사귄 속 깊은 친구처럼 그윽하고 부드럽다.
신발을 빨아야겠다는 관심과 잠시의 수고가 사소함의 행복과 여유를 선물해 준다. 딸이 좋아하는 초밥을 사줄 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날 때까지 교문에서 기다릴 때, 고3 아비로서 작지만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사소하지만 우리는 이웃 간에도 뭔가를 나눌 수 있으리라. 용기의 말 한마디도 어떤 이에게는 큰 힘이 되고 행복이 된다. 신발을 말리며 스스로 작은 일상에 감사함을 배운다. 고3 아비! 나는 일생의 단 한 번뿐이고 다시 올 수 없는 인생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볕에 잘 말려진 말끔한 신발을 신고 세상 속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딸의 모습을 그려본다.
권동진(수필가'열린큰병원 물리치료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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