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정규시즌을 4위로 마감한 삼성 라이온즈는 포스트시즌서 5연승을 달리며 대망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1985년 통합우승을 제외하면 82년'84년'86년'87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나선 한국시리즈 우승 도전이었다.
상대는 정규시즌 1위를 확정 짓고 파트너를 기다려온 LG. 7년 만에 프로야구 무대로 복귀한 백인천 감독이 이끈 LG는 시즌 종료 19경기를 남겨놓고 빙그레에 4.5경기차로 뒤져 우승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러나 19경기서 15승4패를 거두며 역전 우승을 이끌어냈다.
LG의 우승은 빙그레의 갑작스런 추락 덕분이었다. 우승을 목전에 두고 여유롭게 순항하던 빙그레는 9월 중순 김영덕 감독의 계약연장이 알려지면서 급격한 전력약화를 가져왔다. 1988년부터 찰떡궁합을 빚으며 신생팀 빙그레를 2연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던 김영덕 감독과 강병철 수석코치 체제는 1990년 시즌에도 선두를 달리며 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김 감독의 계약연장으로 둘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코치진, 선수단의 동요로 이어졌다.
2위 LG에 4.5경기차 앞섰던 빙그레는 남은 19경기서 7승12패의 믿기지 않는 부진을 보이며 결국 시즌을 3위로 마감했다. LG가 그 틈에 상승세를 타며 역전우승을 일궈낸 것이었다. 시즌 초 '잘해야 4위'라던 LG의 돌풍이 프로야구계를 강타했지만, 전문가들은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즌 전적에서 LG가 삼성에 13승7패로 우세했고 김용수'김태원'정삼흠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투수진이 삼성에 비해 나았지만 전문가들이 삼성의 우세를 점친 건 나름 이유가 있었다. 비록 시즌을 4위로 마감했지만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서 2승, 플레이오프 3승을 거둔 무서운 상승세를 탔고, 난적 해태를 힘없이 주저앉혔다는 자신감이 큰 무기가 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더욱이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일찍 끝내 한국시리즈까지 6일의 여유를 갖게 됐다. 피로를 풀어내고 실전감각을 이어가며 한국시리즈를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경기 없이 긴 휴식을 취한 LG에 비해 흐름을 끊지 않는 적당한 휴식은 여러모로 삼성에 유리해 보였다.
당시 정동진 삼성 감독은 "번번이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막았던 해태를 꺾자 선수단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앞선 4번의 도전에 실패한 아쉬움을 이번에는 꼭 우승으로 풀어내자고 다짐했고 그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LG와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선물보따리를 약속하며 선수단 사기를 높임과 동시에 뜨거운 장외대결로 한국시리즈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삼성이 1억원을 선수단에 내놓을 것을 약속했고, 이에 뒤질세라 LG는 승패에 관계없이 1억5천만원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만년 중하위에 머물렀던 LG와 한국시리즈 단골 들러리 삼성의 대결은 그러나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1차전이 열린 10월 24일 잠실구장. 삼성에 절대 유리할 것 같았던 실전감각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삼성 마운드는 초반부터 LG 타자들에게 난타당했고 삼성은 0대13의 완패를 당했다. 이 경기서 삼성은 한국시리즈 사상 팀 최다 점수 차 완봉패, 또 최다점수 차 패배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또 LG에 21개의 안타를 얻어맞아 한 팀 최다안타에 양 팀 합쳐 38명이 그라운드를 밟으며 최다선수 출장기록까지 모두 4개의 새로운 기록을 쓴 주인공이 됐다.
1차전을 이긴 팀이 우승할 확률은 71.4%. 기세가 꺾인 삼성은 다음 경기서도 만회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다음날 잠실에서 열린 2차전, 삼성은 내내 이기다 9회말 2사서 LG 김영직에 동점 안타를 맞으며 승부를 연장전까지 이어갔고, 11회말 1사 만루서 다시 김영직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내주며 2대3으로 주저앉았다. 한국시리즈 초유의 밀어내기 결승점이었다.
대구서 열린 3차전(10월 27일). 삼성은 9회말 2점을 따라붙었으나 승부를 뒤집지 못해 2대3으로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1986년 10월 22일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서 5대6으로 패한 이후 이날 패배까지 삼성은 한국시리즈 10연패라는 믿기 어려운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삼성은 4차전(10월 28일)마저 패하며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가을 야구를 마감했다. 4차전서 LG는 선발 전원 안타를 터뜨리며 삼성을 6대2로 제압, 적지 대구서 우승트로피를 치켜들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미국과 일본서도 일방적 시리즈로 우승팀이 가려졌다. 미국 월드시리즈에서 약체로 평가되던 신시내티 레즈가 강적 오클랜드 에이스에 4연승을 거두며 패권을 차지했고, 일본시리즈서도 세이부 라이온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4승 무패로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87년째를 맞은 미국 월드시리즈서 한 팀이 4연승 패권을 차지한 적은 3번밖에 없었고 일본 역시 1959년 난카이가 요미우리를 4승으로 꺾은 이후 3번째였다. 1982년 출범한 한국은 1987년 해태가 삼성에 4연승을 거둔 이후 2번째였고 상대는 모두 삼성이었다.
올해 봄 서울서 만난 정동진 전 삼성감독은 삼성의 2006년 한국시리즈 우승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며 그날의 아픔을 곱씹은 그는 "우승의 한을 풀라며 후배들이 선물해줬다"고 말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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