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도가니 신드롬, 안철수 현상

영화 '도가니' 때문에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청각 장애인 특수학교 아이들에 대한 성폭력 사건을 다룬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찰이 마지못해 전면 재수사에 나섰다. 분노의 화살은 몹쓸 짓을 하고도 뻔뻔스레 교단을 지키고 있는 관련자들만 겨냥하지 않는다. 관할 교육청과 수사기관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납득하기 힘든 양형으로 법원이 비난받고 있다. 장애인 보호에 대한 제도 전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분노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도가니 신드롬은 단지 스크린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 안보, 복지, 환경, 인권 등 우리 사회의 모두 분야가 도가니로 변한 지 오래다. 벌겋게 달아오른 도가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형국이다. 서로가 옳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편을 갈라 치고받는 일이 다반사다. 이성과 합리, 상식, 합의의 가치는 증발하고 이념과 돈, 이기심, 권력 지상주의, 권위주의가 뒤엉켜 쇳물처럼 튀고 있다. 무엇이든 닿기만 해도 모조리 녹일 기세다.

일본에 '유식자(有識者·유시키샤)회의'라는 독특한 모임이 있다. 제도 개선이나 국가 현안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요구될 때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구성해 공론화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테이블이다. 중앙정부는 물론 조(町) 단위의 기초지자체까지 중요한 사안이 생기면 관례처럼 이 회의를 개최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의 전문위원회와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유식자와 전문가(專門家'센몬카)를 엄연히 구분한다. 전문가는 말 그대로 그 분야의 풍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다. 유식자는 경륜이 많고 사회적 신망이 두터운 지성인을 이르는 용어다. 따라서 유식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별다른 이의 없이 수용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2004년 여성의 왕위 계승을 규정한 왕실전범 개정을 위해 고이즈미 총리가 사적 자문기구로 유식자회의를 설치한 것이나 '야오초'(八百長) 파문으로 불리는 스모 승부 조작 사건 당시 유식자회의가 구성돼 사태의 조기 수습 방안과 스모 개혁안을 내놓은 것도 그런 예다. 유식자회의는 정책과 제도 개선을 함께 고민하고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균형추와 같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은 유식자회의는 일본이라는 사회를 순방향으로 작동시키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 불어닥친 '안철수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든든한 버팀목의 부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와 지성에 대한 국민의 갈증을 대변하고 있다. 국민은 배제된 채 붕당정치로 변질된 정당정치나 되레 국민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종교계'교육계, 공익과 상식'합리성이라고는 찾기 힘든 경제계와 언론계, 학계, 법조계 등 모든 분야에서 국민은 실망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도가니 신드롬과 안철수 현상은 변화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확인시키고 있다. 자기 논에 물대기에 바쁜 천박한 권력이나 부, 권위주의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지향하는 도덕적'윤리적 권위다. 감기약 슈퍼 판매를 허용한다고 약의 오'남용을 들먹이며 국민을 위협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6만여 약사 표를 챙기겠다고 5천만 국민에 등 돌리는 그런 불의의 정치가 아니다.

순자 '왕제' 편에 '군주는 배,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권력과 부가 최고선이라고 여기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국민의 메시지나 다름없다. 정치권력이든 기업이든 이익집단이든 국민이 등을 돌리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함께 녹는 도가니 사회에서 정치인은 6만여 약사의 표를 얻을 수 있고 약사들은 기득권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게 세상 이치다. 국민은 의원의 대표성을 부인할 것이고 약사의 권위를 무시할 것이다. 그리고 권력에 도전할 것이다. 권위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표와 기득권을 손에 쥘 것인지 잘 저울질해야 한다. 국민이 어디서 희망을 보고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徐琮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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