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⑮이재호 원장의 상주 동성동

산을 넘어 들어서면 광활하게 펼쳐진 누런 평야 내 마음의 이상향

고교시절까지 살았던 상주시 동성동 앞 들녘. 남천의 옥수로 벼농사를 짓던 문전옥답이 예나 지금이나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가을 바람에 실려오는 벼 익는 내음이 유년시절의 기억을 깨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교시절까지 살았던 상주시 동성동 앞 들녘. 남천의 옥수로 벼농사를 짓던 문전옥답이 예나 지금이나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가을 바람에 실려오는 벼 익는 내음이 유년시절의 기억을 깨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학창시절 자주 답사를 왔던 상주 사벌국 왕릉에서 고향 친구인 박찬선 시인(오른쪽)과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학창시절 자주 답사를 왔던 상주 사벌국 왕릉에서 고향 친구인 박찬선 시인(오른쪽)과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이호치과 원장
이호치과 원장

상그리아는 지명이지만 이상향이라는 명사가 된 것은 소설 '상그리아' 때문이다.

상그리아는 1957년까지는 티베트 땅이었지만 중국의 진입으로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 있는 곳이다. 차마고도라는 다큐로 TV에서 여러 번 방영된 고원의 분지가 바로 상그리아다.

당나귀에 차(茶)를 싣고 힘겹게 산을 넘던 그 길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낸 것은 오륙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깊은 계곡, 아슬아슬한 산길 옛 차마고도를 터덜거리는 중국차를 타고 오를 때는 진땀이 났지만, 그 산길의 끝에 갑자기 큰 분지, 평야 같은 땅이 나타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의 평야 상그리아에 들어섰을 때 어쩐지 낯익은 땅이라는 느낌이 들고 내 고향 상주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상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며 넓은 평야다. 상주시의 쌀 생산량이 강원도 전체보다 많다는 것은 상주벌의 크기뿐만 아니라 녹색혁명의 기수였음을 말해준다.

상주벌을 가로지르는 남천과 사방으로 뚫린 봇도랑에는 미꾸라지며 붕어 같은 고기들이 많았다. 학교가 끝나면 간단한 그물을 들고 미꾸라지 잡이에 정신이 없었고 잠자리를 쫓아다니던 추억이 그립다. 벼가 풍성하게 익어가는 가을이면 넓은 평야에 가득하던 벼 향기. 메뚜기 잡이로 노을을 맞던 곳,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어릴 적 추억이다.

뽕나무가 많던 곳이어서 봄이면 입과 입술에 파란 오디 칠을 하고서 서로 마주 보고 웃던 곳. 가을이면 붉은 감들이 파란 하늘과 한 폭의 그림을 형성하던 곳. 그래서 상주를 삼백의 도시라 했다. 쌀과 누에 꼬치, 곶감은 상주의 특산물이었다.

넓은 평야 때문에 상주는 예부터 행정, 문화의 중요한 도시였다. 임란 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기기 전까지 경상감영이 있던 중심도시였다.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기에 유교적 선비정신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급우들과 상견례를 할 때 나도 모르게 큰 절로 인사를 하였더니 서울 급우들이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기억이 난다.

조선조에서는 나라의 인재 반이 영남인재이고 그 절반이 상선(상주, 선산)인재라고 했다고 한다. 상주역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마치 붓처럼 뾰족하게 생긴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갑장산 문필봉이다. 이 문필봉의 정기 때문에 문인과 학자가 많이 난다는 풍수설도 있다.

◆사벌 왕릉과 상주신라(AD 67~100)

고향 상주를 생각할 때면 나를 아껴 주시던 국사 선생님. 황영목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상주의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향토 사학자이시기도 했다. 대학 다닐 때 고향에 내려오면 사벌 왕릉이며 병풍산성, 고분군들을 박찬선 시인과 돌아다니며 설명을 듣기도 했다.

사벌 왕릉은 누구의 묘인지 확실치 않다. 비석에는 상산 박 씨의 시조로 되어 있는 박언창의 묘라 해서 비석도 있고 재각도 있지만 그럴 리 없다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 대표적 인물인 김성호 선생은 '비류 백제와 일본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신라 말기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이 이곳에 와서 사벌국왕을 자처하고 10년간 싸우다가 죽었다. 하지만 재위 8년에 요절한 경명왕이 아들을 그리 많이 두었는지도 의심스럽고 아들이 많다 하더라도 통치체제가 와해되었던 신라 말기에 왕자를 상주 방어 장으로 임명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AD 1486)에는 '연세전 사벌 왕릉(然世傳 沙伐 王陵)이라 하여 예부터 사벌 왕릉이라고 전해 온다'고 하였다.

조선 중엽에야 비로소 박언창의 이름이 등장한다. 여기서 사벌이라는 지명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는 나이 13세 때 국호를 서러벌이라고 하고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서라벌은 국호이기도 하지만 지명이기도 하다. 서라벌을 서벌이라고도 했으니 서라벌, 서벌, 서울로 변한 현재의 서울 부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려의 왕도였던 개경이 서울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서울은 수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지명인 것이 분명하다. 서라벌을 경주라고 인정하나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초기 신라가 경주에 도읍했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으로 남으로, 남으로 밀려오다가 도읍한 곳이 상주 사벌. 여러 고 문헌을 검토하면 AD 67에서 AD 100년까지 30년 넘게 상주 사벌에서 도읍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벌 왕릉은 경주로 남천하기 전 신라 초기의 어느 왕의 무덤일 것이라 짐작된다고 주장한다. 병풍산성, 사벌국성과 고분군이 그때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병풍산성 아래서 옛 천년을 생각하며 천년이 어디 있으랴. 순간이 천년인 것을 되뇌던 옛날이 그립다.

◆낙동강 제1경 경천대

낙동강 천삼백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경천대는 학생시절 소풍장으로 가장 많이 들리던 곳이다. 지금의 경천대는 잘 정비되어 있지만 1960년대에는 울창한 노송과 기암절벽. 정자 하나. 비석 몇 개뿐이었다고 기억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의 경천대 정상에 오르면 눈아래 넓게 펼쳐진 황금빛 모래밭과 굽이치는 강물과 조화를 이룬 검푸른 용소의 굽이친 모습이 눈을 붙든다. 장관이다. 경이로운 자연의 조화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경천대는 우담 채득기 선생이 청나라 원수를 갚으려는 충절을 나타낸 봉산곡의 현장이며 정상 암벽에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幀日月)이라고 새기고 충절의 뜻을 나타냈으나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대주의라고 탓하는 바도 없지 않다.

경천대(擎天臺)는 1645년(인조23) 이전에는 자천대(自天臺)라고 하였다.

경천은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이니 장차 봉림대군이 임금이 되면 그(효종)를 도와 북벌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경천대는 낙동강 제1경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풍광을 지니고 있다.

◆열린 도시, 미래를 향하는 도시 상주

구한말과 일제시대 때에 경부선 철도가 설계될 때, 처음에는 부산에서 상주를 경유하여 서울로 가는 노선으로 설계되었지만 상주 유림들이 격렬히 반대하여 김천을 경유하는 경부선이 부설되었다고 한다. 유교적 완고함이 교통의 요지가 될 기회를 놓치고 쇠락하는 도시가 되게 하였다. 경상도의 중심 도시였던 상주는 현대화에 소외되어 쇠락을 거듭하였다. 1960년대에 인구 28만이던 웅군 상주가 10만이 조금 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최근 고향을 방문할 때면 넘치는 생기를 느끼게 된다. 고속도로의 중심도시가 되어 남한의 한복판. 중심 도시가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상주~청원 간 고속도로는 서해에 닿아 있고 상주~영덕 간의 고속도로는 곧 동해에 닿을 것이고 중부내륙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에 버금가는 간선도로가 되어가고 있었다. 친환경 교통수단인 자전거의 메카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상주박물관과 국제승마경기장, 자전거박물관까지 있다는 것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과 낙동강역사문화생태체험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4대강 정비로 상주보와 낙단보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낙동강 중심 도시로서의 옛 명성이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마음의 상그리아가 아닌 실제의 상그리아로 향하는 고향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다.

(이호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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