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마음의 책] 기억 지우고 사랑까지 파괴, 알츠하이머의 공포

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예담 펴냄

광고회사 영업부장인 사에키는 올해 나이 쉰으로, 스스로 아직 팔팔하게 일할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알츠하이머'가 찾아온다. 최근의 기억이 먼저 사라지더니 간단한 계산을 못하게 되고, 오래된 기억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동료 직원들의 이름과 얼굴, 중요한 약속, 조금 전에 했던 말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아내와 아이의 얼굴까지 잊어간다.

이제 사에키는 이전의 사에키가 아니다. 그의 몸뚱이는 50년을 살아왔지만, 기억은 텅 비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스스로 알 수 없고, 멍하기만 하다.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과정에는 온갖 사연과 생각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빨리 죽기라도 하면 났겠다. 그러나 5년 혹은 10년을 더 살아야 한다. 가족들은 이제 내가 아닌 나를 보살피고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내게는 추억도, 사랑도, 가족도 남아 있지 않다. 가족과 친구는 분명 존재하지만, 나는 그들을 모른다.

사람은, 특히 그가 중년 이상의 나이라면 그가 가꾸어갈 미래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날, 이룩한 과거로 규정되고, 과거로 존재한다. 그러니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나를 잃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치명적인 질병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는 내 생명, 내 미래를 파괴한다. 알츠하이머는 여기에 더해 내 과거를, 관계를, 사랑을 파괴하려고 든다. 미래 없는 내가 아니라, 과거 없는 나를 무슨 수로 증명할 것인가. 알츠하이머가 다른 질병보다 두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기억이 사라져도 나의 지난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잃은 기억은 나와 같은 나날을 보낸 사람들 속에 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나는 나를 잊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버리지 않는 한, 알츠하이머는 내 과거를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존재했음을 완전하게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나와 함께 존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잊는 순간, 비로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에키는 젊은 시절 가본 적이 있는 도예 가마터를 찾는다. 거기서 역시 알츠하이머에 걸린 도예공(스승은 아니지만 스승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 도자기를 굽고, 감자와 양파를 구워 먹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물론 사에키는 오는 길에 꼼꼼하게 해두었던 메모를 따라 걷고 있다. 그의 옆에 어떤 여인이 나타난다. 미인이다. 여인은 가마터 아래에서 사에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사에키와 나란히 걷는다. 혼자서 걷기 쓸쓸한 길이라 생각했는데, 옆에 여인이 나타나니 왠지 든든하다. 사에키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 여인의 이름을 묻는다. 여자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에미코라고 합니다'고 대답한다. 에미코는 사에키의 아내다. 물론 사에키는 아내를 기억하지 못한다.

"좋은 이름이네요."

두 사람이 대학생이던 시절, 처음 만났을 때 주고받았던 대화도 그랬다.

385쪽.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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