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16)문무학 대구예총 회장의 고령 낫질

바람만 건듯 불어도 가야금 울던 우리 동네

낫질 골짜기 안쪽에 자리한 저전동 . 지금은 형수가 살고 있는 고향집 넓은 마당은 배추밭이 되었고 마당 한켠에 자리한 우물에는 아직도 찬물이 고여 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래서 내 가슴속 고향 주소는 여전히 눈물 부근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낫질 골짜기 안쪽에 자리한 저전동 . 지금은 형수가 살고 있는 고향집 넓은 마당은 배추밭이 되었고 마당 한켠에 자리한 우물에는 아직도 찬물이 고여 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래서 내 가슴속 고향 주소는 여전히 눈물 부근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학창시절, 고향집 인근 마을(중화리) 훈장에게 한문을 배웠던 명곡정(明谷亭)이 옛모습 그대로다. 명곡정은 1922년 여주이씨 문중에서 청소년들의 학문 수학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학창시절, 고향집 인근 마을(중화리) 훈장에게 한문을 배웠던 명곡정(明谷亭)이 옛모습 그대로다. 명곡정은 1922년 여주이씨 문중에서 청소년들의 학문 수학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오랫만에 도리깨질을 하며 콩타작을 했다. 기계화 영농이 한창이지만 도리깨는 용케도 살아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오랫만에 도리깨질을 하며 콩타작을 했다. 기계화 영농이 한창이지만 도리깨는 용케도 살아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문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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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재 올라서면 팔벌리며 다가서는/ 금천 건너 아늑한 대가야국 도읍지엔/ 바람만 건듯 불어도 가야금이 울어온다.// 정정골 굽어 뵈는 주산 그 들머리에/ 열두 줄 가얏고 우륵 선생 현이 떨면 / 정정정 우는 산천의 풀꽃 하얀 빛을 본다." (바람도 고향바람은 중에서)

내가 자랄 때 우리 집 주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 저전동 540번지였다. '면'이 '읍'이 되고 '동'이 '리'로 바뀌더니, 지금은 고향집 같지도 않은 저전1길 13-10 이 되었다. 고령읍 서북쪽 골짜기의 자연 부락 정정골, 화갑, 던덕, 담마, 섬마, 동촌, 안골, 옥담, 음지마, 낫골을 아울러 부른 '낫질' 이 진정한 내 고향 이름이다.

낫질은 긴 골짜기다. 그 입구는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만든 곳, 가야금이 정정 울었다고 해서 정정골로 부른다. 지금은 우륵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골짜기의 끝 낫골 뒷산은 이미숭 장군의 충심이 서린 곳.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 문하의 이미숭 장군이 태조의 소환에 불응, 이태조군에 쫓겨 남하하여 이 산에서 접전하다 순절. 원래 '상원산'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미숭산'으로 불렀다. 그 미숭산이 내겐 가장 높은 산이었고 내 꿈의 높이였다.

낫질을 떠나와서, "고향은 아무래도 아련한 저녁 연기"(동구)라고 쓴 적이 있다. 그 후로도 "고향도 안태고향 굽어가는 그 길에는/ 이정표 언제라도 그리움 물고 섰지만/ 눈물로 찾아가는 길/ 돌아서도 눈물의 길"이라고 쓴 적도 있다. 왜 그렇게 나는 고향을 눈물 부근에 그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 오고 열흘 만에 아버지는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그때부터 우리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는 좀체 걷히지 않았으리라.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비교적 조용한 아이로 자랐다. 형이 있었지만 11살이 더 많았고 누나도 여섯 살이 더 많았으니 친구처럼 논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책상이 없는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은 가마니 쪽을 깔고 앉아 공부했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짜주신 예쁜 짚방석에 앉아 공부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한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생활했다. 겨울 아침엔 도시락 두 개, 난방을 위한 장작 한 다발씩 메고 학교로 갔고, 밤이면 어두운 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그때 담임선생은 입학시험 준비하는 와중에서도 일기 쓰기와 동시 쓰기를 꼭 숙제로 내 주셨는데 그 때 자주 들었던 칭찬이 책과 가까이하며 살게 했으리라 믿는다.

중학교가 있는 읍내까지 그냥 십리, 십리 해왔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멀었으리라. 선배형들이 아침에 한곳에 모여서 등교하자고 모아, 온갖 짓궂은 짓들 하다가 늦으면 마라톤 하듯이 달려가기도 했다. 하굣길엔 두 사람을 뽑아 싸움을 붙이곤 했다. 그때도 그것이 참 못마땅했지만 선배들에게 대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중 2학년 가을, 수학여행을 갈 때, 나는 여행비를 내지 못해 집에서 가을걷이를 돕고 있었다. 그날 부산에서 무슨 사업인가를 하시던 종조부가 오셔서, 왜 학교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고……이튿날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 구경시켜 주신다고 데리고 가시다 고령읍 주차장 식당에서 짜장면을 사주셨다. 생전 처음 본 짜장면 어떻게 먹는 줄 몰라 머뭇대는데, 짜장을 섞어주셨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도 몰랐다. 워낙 맛있게 먹으니까 한 그릇 더 시켜줄까 하셨는데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던 것이 지금까지도 후회스럽다.

그 무렵부터 나는 나 혼자만의 재미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고령읍내의 만화방에 있는 대중소설을 빌려 읽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읽으면 안 될 대중소설이었는데 무지무지 재미있었다. 중3때, 비가 와서 체육수업을 교실에서 하는 날이었는데 나쁜 소설(?)을 읽다가 선생님에게 들켰다. 혼이 났다. 체육 선생님은 교무실까지 나를 데리고 가서 꿇어앉혀 놓고 선생님들께 다 알리고, 선생님들은 교무실을 드나드시며 내게 '짜식, 짜식' 하시며 알밤을 먹였다.

농가에서 자라며 그 나이에 할 수 있었던 일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소를 먹이는 일과 꼴(소 먹이풀)을 베는 것이었다. 소 먹이러 가면서 감자를 가지고 가서 돌을 데워 구워 먹던 일, 밀이 날 때면 밀사리, 콩이 날 때면 콩사리로 시간을 보냈고, 꼴망태 메고 소설책 숨겨가서 나무그늘이나 계곡의 바위에 앉아 읽던 재미, 그런 건 정말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황홀한 순간들이었다. 담마못에서 헤엄치며 놀던 일, 50여m나 될까, 그 못 헤엄쳐 건너서 스스로 대견해 하던 기억 선명하다. 겨울엔 나무를 해 와서 불 때기 좋게 쌓아두고 흐뭇해하기도 했다. 그 무렵엔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라디오를 통해 대중가요를 배우고, 낫질골짝 바깥의 소식을 들으며 상상의 꿈을 펼쳤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못했다. 그때의 가장 큰 꿈은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었는데, 집에서 읍내에 있는 농고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가지 않겠다며 버티다 결국 가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놀면서 그 때까지 낫질에 있었던 서당엘 다니며 '명심보감'을 읽었다. 서당의 수업료는 훈장님께 '풍년초' 라는 잎담배 몇 봉을 사다드리는 것이었다. 하루에 공자님의 말씀 한 마디씩만 가르쳐주고 그걸 그 이튿날 훈장님 앞에서 외워야 했다. 외우지 못하면 외울 때까지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별 부담 없이 그 공부를 하다말다 했고, 이듬해 고령농고에 입학했다. 입학생은 60여 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여학생도 일여덟 명 있었다. 중학교로는 한 해 후배가 되는 아이들과 공부하는 게 참 멋쩍었다. 농고는 실습이라고 하며, 각종 채소를 기르고, 닭과 돼지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게 싫어서, 정말 싫어서 실습 시간엔 땡땡이치고 학교 뒷산 무덤가에 앉아서 농민 잡지 등에 실렸던 시를 읽으며 집과 세상을 원망하며 서러워했다. 선생님들로부터 자주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런 혼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농업이 싫었다. 그런 것들이 공부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농업 과목 시간에는 그 당시 대학 입학 과목이었던 책들을 펼쳐놓고, 가지도 못할 대학의 꿈만 키웠다. 영어 선생님만 격려했고, 농업과목 선생님들은 나를 어쩔 수 없는 문제아로 여겼을 법하다. 실습시간에 그래도 빠지지 않고 나갔던 과목은 여선생님이 가르치던 '화훼원예'라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교내의 화단 가꾸는 일을 주로 했는데, 그 여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나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렇게나 떠나고 싶었던 낫질이 지금은 마냥 그리운 곳이 되었고, 이제 남은 생을 낫질에 가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자동차를 타고 가면 한 시간이면 족하고, 한 바퀴 휙 돌아오기만 해도 가슴이 넉넉해지기도 하는데, 그래도 내 가슴 속 고향 주소는 여전히 눈물 부근이다. 아마도,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아흔여섯 해를 사셨으면서도 서른여섯에 남편 잃고 오로지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한 많은 세월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 고향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런 내 고향, 낫질의 가을은 오래전에 썼던 '가을에' 라는 시 속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풀잎 마른 대궁에 서리가 내리는 밤/ 잠 속에서 꿈을 엮던 손주놈을 달래시며/ 할매는 세월을 벗기듯 납닥감을 깎았다.// 껍질에 줄을 이어 한때 한때 생각히는/ 대광주리 쏟아놓은 무늬없는 생애 위에/ 귀뚜리 울음소리가 주름살을 만들고// 헛기침이 밝혀놓던 호롱불 적막한 밤/ 바람에 건너가는 할머니 한 세상이/ 곰방대 재 떨던 방에 하얀 분으로 덮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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