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필름통] 여학생들 속에서 대성통곡했던 복싱영화

영화를 보다 훌쩍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리는 경험을 간혹 한다.

로봇 복싱영화인 '리얼 스틸'을 볼 때도 그랬다. 이 영화는 한때의 명성을 뒤로한 채 쇠락한 전직 복서 아버지와 존재도 없던 아들이 함께 로봇 복싱 경기로 부자간의 정을 쌓는다는 이야기다.

'리얼 스틸'은 1979년 '챔프'(사진)란 영화를 쏙 빼닮았다. 로봇이 나와 복싱을 한다는 껍데기는 다르지만 영화 안의 정서는 그대로다. '챔프'는 나이 든 복서가 아들을 위해 링 위에 다시 서 처절한 사투 끝에 숨을 거두는 영화다. 링 밖에서 "챔프! 일어나!"를 외치며 우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보며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장면은 참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본 것은 1979년 10월경이었을 것이다. 9월에 개봉했고, 영화를 본 곳이 당시 재개봉관이었던 자유극장이었으니 그쯤일 것이다.

2층 객석에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웅성거리더니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단체로 영화를 보던 문화교실이었던 모양이다. 엉거주춤할 때 여학생들이 앞뒤, 양옆으로 앉아 버려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이미 여학생들의 장난스런 눈빛도 받았고, 개중에는 추파도 있었다. 졸지에 여학생들 사이에 교복 입은 남학생이 하나 끼어 영화를 보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그나마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눈물 때문이었다. 아들인 릭키 슈로더가 오열을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을 참으니 목이 뻣뻣해지면서 뒷골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인 존 보이트가 눈을 감는 대목에서는 남자의 체면이고 뭐고 울 수밖에 없었다. 아내 페이 더너웨이로부터 버림받고, 그래도 아들을 위해 링 위에 오른 아버지의 뜨끈한 정이 빛도 보지 못하고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다행히 여학생들도 통곡을 했고, 극장 안은 릭키 슈로더도 울고, 남학생도 우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여학생들이 다 나간 후 극장 문을 나섰다. 밖은 아직 훤한 대낮이었고, 사람들로 붐볐다. 그 사람들 사이로 혹시 눈물 흘린 것이 들킬까 얼굴을 몇 번이나 훔치며 사라지는 남학생의 모습,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여학생과 눈도 못 마주치던 순진하고 착한 남학생이 그들 속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던 그날은 지금처럼 화창한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창피했지만 지금은 소중한 나만의 시네마천국, 필름통 속 필름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ㅎㅎㅎ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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