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 <1>100년 전 만주 망명행렬

전 재산 털어 "대한독립" 추산 권기일 선생 흔적 찾기 손자가 직접

항일순국지사 추산 권기일 선생의 초상화를 안은 손자 권대용 씨가 옥수수가 무성한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찾아 90여 년 전 이 옥수수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할아버지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항일순국지사 추산 권기일 선생의 초상화를 안은 손자 권대용 씨가 옥수수가 무성한 신흥무관학교 옛터를 찾아 90여 년 전 이 옥수수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할아버지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작년이 1910년 나라를 잃은 '국치 100주년'이라면 올해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이 일제히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1911년으로부터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삭막한 만주 벌판에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농사를 지으면서 독립군을 양성해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벌이며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항거해 온 선열들의 항일투쟁 발자취는 구한말 격동기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역동적으로 장식했다.

100년 전 당시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바치고, 자신의 가문은 몰락해 버린 안동의 한 독립지사 집안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통해 '만주 항일투쟁 100주년'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인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일군의 공격에 맞서 학교를 끝까지 지키다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이 된 추산(秋山) 권기일(權奇鎰'1886~1920) 선생. 1945년 해방된 지 올해로 벌써 66년이나 지났지만 항일 독립지사 권 선생의 손자 권대용(63'안동 송현동) 씨의 투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삼천 석이나 되던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애실 종가의 전 재산을 몽땅 털어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바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일투쟁에 나섰지만 결국 무관학교를 쳐들어 온 일제와 싸우다 끝내 순국하면서 대대로 지켜 오던 그의 가문이 일시에 몰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권 씨는 가문의 주손으로서 종가 재건에 나서는 등 무너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고 있다. 개인택시 기사로 변변찮은 수입이지만 푼푼이 모아 벌써 2차례에 걸쳐 추산 선생 독립운동 일대기를 쓴 책을 내는 데 보탰다.

만주 항일 무장투쟁 100년이 되는 올해를 기려 그는 만주 신흥무관학교 터를 3차례나 다녀왔다. 옥수수밭으로 변해 버린 길림성 통화시 합니하 옛 신흥무관학교 터를 찾아간 그는 추산 선생의 초상화를 놓고 절을 올리며 목놓아 울기도 했다. 초상화를 가슴에 안은 그는 추산이 순국한 장소를 찾기 위해 옥수수밭을 마구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항일투쟁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할 때 추산의 생가(종갓집)도 팔게 됐지만 집안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가난이 대를 이어 오면서 10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권 씨는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고가옥 추산 생가를 다시 되찾아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는 초석으로 삼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요원의 불길 같은 도만행렬

100년 전인 1911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나라를 강점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전국에서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한 '도만 행렬'이 요원의 불길처럼 이어졌다. 새해 벽두 제일 먼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향했다. 이어 일동 김동삼, 김대락 등도 가산을 정리하고 총총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만 25세인 추산은 젊은 나이에도 주저 없이 이 도만 행렬에 동참했다. 추산 집안의 막대한 재산은 만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 된 신흥무관학교를 1912년 이전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20년 8월 15일 무관학교를 공격해 온 일군과 맞서 항거하다 순국할 때까지 8년여 동안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데도 큰 힘을 보탠 숨은 독립지사로 알려져 있다.

권대용 씨가 말하는 할아버지 추산 권기일 선생의 일대기는 대략 이렇다.

1886년 10월 안동 남후면 검암리 '대애실'(대곡)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성품이 온후한 데다 기개와 도량이 넓고 학문이 뛰어나 나이 열여덟에 면 의원을 지내는 등 일찍부터 안동지역에서 사회활동이 남달리 활발했다. 특히 애국심 또한 투철해 구한말 국가의 쇠락을 개탄하면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항상 걱정했다. 그러다 만 19세 되던 1905년 을사망국조약이 강제로 맺어졌다. 안동지역 향내의 석주 이상룡 선생과 김현식, 김대락 선생과 만나 대책을 의논하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고 을사오적 성토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 기어이 한일강제병탄조약이 공포되기에 이른다. 이에 추산 선생은 망국의 한을 품고 올해로 꼭 100년 전인 1911년 가을, 당시 25세의 나이로 어머니와 아내, 아들, 형제 등 가족들을 대동하고 만주로 떠날 채비를 한다.

◆독립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설립

앞서 1년 전에 미리 만주로 떠난 석주 이상룡 선생 일행이 머무르던 서간도 지역 통화시 추가가 마을 일원에서 난데없는 재해가 닥치는 바람에 초기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해 8월 말쯤에 난데없이 한여름 폭설이 내리는 등 심각한 흉년이 든 데다 전염병까지 돌아 뜻밖의 난관에 봉착한 선발대 일행을 돕기 위해 추산은 도만 채비를 더욱 서둘렀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3천 석의 재산을 몽땅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40여 명이나 되는 노비들도 해방시킨 다음 구국의 일념으로 주저 없이 만주로 향했다. 일경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꿔 호적을 정리하고 구미 선산 해평으로 이사를 간다고 소문을 내기도 한 추산은 가족들과 함께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 통화현 추가가 일원의 독립운동 활성화에 즉각 착수했다.

이상룡, 이시영, 김좌진, 김동삼 등이 나서 설립한 초기 신흥무관학교는 추산의 도움이 보태지면서 1912년 봄 통화현 광하진 합니하 강변으로 이전 확장됐다. 동남쪽에서 서남쪽까지 삼면이 합니하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북쪽으로 높은 절벽이 이어져 있어 무관학교로는 천혜의 요새 조건을 갖고 있는 곳. 구릉지가 넓어 승마와 총검술 등 군사교육을 하는 데 손색이 없는 곳이다.

석주와 추산은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그리고 일제의 압제를 피해 만주로 끝없이 넘어오는 우리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도 애썼다. 추산은 석주의 명을 받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훈련을 하는 예비부대 성격의 백서농장을 지원해 독립군의 생활을 안정시켜 나갔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즉각 서로군정서에 참가해 한족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각 방면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결성을 높이는 외무 업무를 맡아 열성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최후의 1인, 추산의 장렬한 순국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일군의 공격을 받을 때까지 모두 7천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2개 사단 규모 병력이다. 일군을 격멸한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19년 8월 추산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연락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지만 다음해인 1920년 5월 이후 넉 달간 계속된 일제의 간도 학살 만행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저항해야만 했다. 통화시 일원에 남은 우리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서 일경의 밀정 색출과 군자금 획득 등 은밀하면서도 중요한 고난도의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해 8월 15일 혈혈단신 혼자 남아 신흥무관학교를 사수하던 추산 선생은 무관학교 북서쪽 산을 넘어 쳐들어온 일본군의 습격에 끝까지 항전했으나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어 무관학교 인근 옥수수밭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무관학교 인근 옥수수밭에서 일군에 포위당한 추산 선생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일제의 총검에 의해 전신을 20여 차례나 난자당하면서도 숨을 거둘 때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했다. 그의 나이 34살 때의 일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신흥무관학교를 지키다 최후의 1인이 되어 쓰러져간 추산. 그의 불굴의 애국애족 정신은 청사에 길이 빛날 우리 민족정신의 표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추산 후손에게 생가 되찾아 줘야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애실 주손의 전 재산이 만주 독립운동의 초기 난관을 돌파하고 신흥무관학교 이전 확장에 다 들어갔다는 사실(본지 8월 17일자 5면 보도)이 올 들어 알려지게 되면서 항일순국지사 추산 선생의 항일 행적과 그의 손자인 대용 씨의 '몰락한 가문' 재건 활동이 관심을 끌고 있다. 독립운동을 위해 부득이 매각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서 추산 생가를 되찾아 돌려줘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이다.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지난 8월 추산과 그의 후손에 관한 책을 냈다. '순국지사 권기일과 후손의 고난'이라는 책이다. 이전에도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추산의 일대기를 책으로 엮어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했다.

"꿈에서라도 할아버지의 유골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한이 없을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생가를 되찾고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데 세월만 자꾸 덧없이 보내는 것 같아 애가 탈 뿐입니다."

택시운전으로 어렵사리 생계를 유지하는 추산의 손자 권대용 씨는 아직도 추산의 산소를 찾지 못했다. 수차례 만주를 찾았지만 어느 곳쯤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지금은 일대가 옥수수밭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명가의 후손답게 매우 당당하다. 명문가의 자부심과 독립운동가의 손자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올여름 7월과 8월, 9월 모두 3차례에 걸쳐 만주 통화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추산 선생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를 올리고 만주 일원의 항일 유적지를 모두 둘러본 대용 씨는 삼복지간 무더위에도 양복 상의를 벗지 않을 정도로 웬만해선 단정한 옷매무새를 흩트리지 않는다. 그는 광복회 대의원으로 광복회 안동지회 사무국장,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사진작가 강병두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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