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신문 논설위원이 쓴 칼럼을 보게 되었다. 한글날에 즈음해서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이었다. 방송인으로서 관심이 가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독자의 위치에서 볼 때 너무나 안타까운 표현방법들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우리글에 스며 있는 심연의 깊이와 창해 같은 넓이를…"이라며 마무리를 지었는데 마치 'MADE IN CHINA'가 찍힌 한복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왜 꼭 그렇게 표현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계속 지워지지 않았다. 비유와 은유 등의 기술로 한 번 더 생각을 곱씹게 만드는 그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좋은 화자는 듣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심연'과 '창해'를 '깊은 연못'과 '넓은 바다'라 표현한다고 해서 무식하다거나 교양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전문적이고 비일상적인 말을 쓰는 이유는 뭘까? 경우에 따라 유형에 따라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과시라고 여겨진다.
점잖게 그냥 도로 위에서 굴러가기만 해도 그 자체로 광채가 나고 시선이 쏠리는 억대의 중형차가 촐싹대며 이리저리 차로를 옮겨 다니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안쓰럽고 애처로울 때도 많다. 과시하고 싶어 구입한 차 자랑에도 부족해서 무리한 운전으로 또 한 번 시선을 받고 싶어하니 말이다.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남 앞에서 자기를 높이거나 내세우지 않아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자존감에 생채기가 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존재를 과시해 남들보다 자신이 우월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순간 신경시스템에는 쾌락을 느끼게 해 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자기과시를 통해 우월함을 확인받았다고 인지하는 순간 이런 신경시스템이 작동해 쾌감과 즐거움이라는 포상을 뇌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상을 받으면 계속 받고 싶어하는 것처럼 과시가 점점 커지고 허풍으로 이어져 결국은 혼자만의 섬을 만들기도 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宰相)인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어이없어 하며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하고 물었다. 그가 "이제 3년이 됩니다"고 대답하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일이 없지 않소?" 하고 반문했다. 모수는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끝이 아니라 자루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하고 재치 있는 답변을 했다.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고,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받고, 구원군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자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유래다. 여기서 나온 주머니 속의 송곳, '낭중지추'는 재능이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대놓고 송곳이 뾰족한 끝을 내세우고 다니면 망치와 톱들은 그 끝을 처단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쓸 것이다.
자기과시는 미움을 사며 시기심을 유발시킨다. 남에게서 존경과 인정은 바랄수록 작아진다. 그것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서 얻어지는 것이다. 평상의 모습만으로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우라'는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을 남들이 보는 것이지, 절대 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 아우라가 아니다. 치부(恥部)다.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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