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산허리를 돌아서면 이내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좁다란 산길, 보일 듯 말 듯 휘어지고 돌아가는 숲길과 들길, 외씨버선의 아름다움과 움직일 듯 멈출 듯하면서도 이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승무의 춤사위 같은 길이 있다.
'외씨 버선길'이다. 경북 청송과 영양'봉화, 강원 영월 등 4개 지역이 협력해 꾸며가는 명품 길이다. 이 길에는 자연의 속삭임이 있고, 역사의 아픔이 있으며, 새로운 숲의 치유와 희망을 전해주며, 민족 수탈과 조국 근현대사의 한이 서려 있다. 게다가 이 길에는 농촌 들녘의 풍요로움과 고즈넉함이, 지역마다 내세우는 최고의 이야기들이 스며 있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이 길은 채우고, 또 비우고, 몸보다는 마음으로 걷고, 그 마음으로 숨을 쉬고, 들숨 날숨에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길임이 분명하다. 전국 최고의 명품 길로,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는 효자 길로 보듬고 가꿔지고 있다.
◆BY2C(봉화'영월'영양'청송) 연계협력사업 '외씨버선길'
'외씨 버선길'(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은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경북 청송, 영양, 봉화, 강원도 영월 4개 군의 마을길과 산길을 이은 길이다.
'외씨 버선길'이라는 이름은 영양 출신인 시인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총 170㎞의 생태'문화 탐방로로 가꿔지고 있다.
지금까지 청송 11.5㎞(운봉관~한지체험장, 객주 보부상길), 영양 1차 8.3㎞(일월산자생화공원~우련전, 시인의 길)와 2차 25.2㎞(선바위~감천마을 11.5㎞ 구간 오일도 시인의 길, 영양읍 전통시장~일월면 조지훈 문학관 13.7㎞ 구간 조지훈 문학길), 봉화 17.6㎞(춘양면사무소~춘양목체험관, 정자고택길), 영월 10.4㎞(김삿갓문학관~김삿갓면사무소, 박물관 길)로 총 73.2㎞가 완성돼 있다.
청송은 '고택에서 전통가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우리 부모님이 다닌 옛길을 추억하고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고, 봉화는 '춘양에서 5일장을 구경하고 과수원을 따라 문수산 둘레로 자리 잡은 마을과 마을이 통하고, 춘향목의 솔향기가 나는 길'이다.
영양은 '일월산 자생화공원에서 우리의 역사적 아픔이 묻어있는 일제강점기의 광산을 둘러보고, 반변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의 뛰어난 경관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자연 치유의 길'과 오일도 시인과 조지훈 시인의 시향을 느끼면서 자연을 노래할 수 있는 길이다.
영월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행적을 따라 자연을 벗하며 걷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길 속의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오일도 시인의 길
일제강점의 암울한 시대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버리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1901∼1946). 오일도 시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잡지인 '시원'(詩苑)을 창간해 시를 통해 시대적 아픔을 노래하려 했던 숱한 문인들을 지원했다.
특히 시인 오일도는 자신의 작품활동보다는 지역 후배 문인들의 시집 출판과 잡지 '시원'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하는 등 '지역 문인들의 맏형'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성으로 감정을 절제하기보다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던 그의 시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길이 '외씨 버선길-오일도 시인의 길'로 조성됐다.
영양군 입암면 선바위관광단지를 출발해 반변천을 가로질러 놓인 '석문교'(石門橋)를 건너면 수십 척 층층 절벽 아래 오솔길이 시작된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과 감천리 학초정, 천연기념물 측백나무수림, 감천마을과 오일도 시인의 생가를 거쳐 감천마을 초입 구 국도와 강둑을 지나 영양전통시장까지 11.5㎞의 거리다.
이 길 초입에는 깎아지른 절벽과 울긋불긋 물들고 있는 단풍나무, 솔향 짙은 소나무 숲을 지나 박물관 마당으로 빠져나오면 이내 반변천 강둑길로 이어진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들녘의 고즈넉함, 학초정'측백나무수림 등 문화재가 지닌 역사 속의 무게, 감천마을에서 불어오는 시인의 향기 등을 발로 걸으며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달 20일 첫걸음 행사에 참여했던 김선옥(56'서울 종로구) 씨는 "길이 오밀조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오일도 시인이 이 길을 걸으며 시대적 아픔을 시로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조지훈 문학의 길
'외씨 버선길'은 이어진다. 청송에서 출발한 이 길은 역사를 거슬러 오르고 지역을 건너 북쪽으로 이어진다. 결국에는 강원도 영월까지 계속된다. 오일도 시인의 길과 연결된 길 이름은 '조지훈 문학길'이다.
영양 전통시장과 시장 안에 설치돼 있는 '외씨 버선길 영양객주'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영양읍 삼지리와 삼지연꽃테마단지를 거쳐 노루목재와 상원3리를 지난다.
곡강팔경의 으뜸인 '척금대'를 좌측으로 멀찌감치 돌아서 금촌산길과 곡강교, 일월삼거리를 지나 이곡교와 영양향교를 스치면 조지훈 시인의 마을인 주실마을과 조지훈 문학관으로 이어지는 13.7㎞다.
이 길의 특징은 영양지역이 자랑하는 천혜 자연경관에다 반변천과 어우러진 산'들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걷노라면 강을 따라 흐르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실려오는 솔향과 함께 길이 이어질수록 시인의 시향이 함께 배어난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그의 형 동진의 시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주실마을은 예천 금당실과 함께 '반 서울'로 불리던 명당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해마다 지훈예술제가 열려 '시인의 숲'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주실마을 앞에 자리한 숲에는 대부분 100년이 넘은 거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며 조동탁 시인의 시비를 접할 수 있다. 이곳에서 몇 걸음만 보태면 조지훈 시인의 시비와 문학관으로 들어설 수 있다.
BY2C연계협력사업단 김성진 부단장은 "외씨 버선길 가운데 영양 2차 구간인 '오일도 시인의 길'과 '조지훈 문학길'은 단순히 걷는 도보길 수준을 넘어 시대적 아픔을 간접 경험하고, 그 시대 시인들은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며 "이 길에는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강과 함께 교훈을 남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일월산 치유숲 길
일월면 용화리 대티골에서 시작해 옛 국도를 따라 우련전으로 이어지는 외씨 버선길 영양지역 1차 길이다. 용화리 천문사 입구에서 시작되는 옛 국도를 따라 텃골, 깃대배기, 깨밭골을 지나 칠밭모기까지 이어진다. 그곳에서 외씨 버선길은 오른쪽으로 계속돼 영양터널 입구로 이어지고 우련전까지 계속되는 8.3㎞다.
오랜 세월 수탈과 훼손된 일월산 국도와 군사도로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치유와 자연의 길로 재탄생한 것.
이 길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낙엽송림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다래덩굴'칡덩굴이 뻗어 오른 어두운 숲길에선 솔향도 나고 더덕향도 난다. 옛 국도에는 '영양 28'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인근 나무의자 쉼터가 있는 '진등'에는 빨간색과 연녹색의 우체통 2개가 서 있다. 희망우체통이다. 주민들이 아이디어를 냈으며 빨간색 우체통에서 엽서를 꺼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연녹색 우체통에 넣으면, 주민들이 1년 뒤 엽서를 부쳐준다.
칠밭목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소천면' 경계임을 알리는 옛 국도판을 만난다. 왼쪽은 일월산 정상 오르는 길, 오른쪽은 봉화 갈산리 우련전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련전'(雨蓮田)은 조선말 신유박해를 피해 들어와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집단생활을 했던 성지다. 이곳은 내년 초 완성될 봉화군 소천면과 영양군 수비면 경계지역을 따라 이어지는 2차 외씨 버선길 조성 예정 구간이다.
권영택 영양군수는 "영양지역에 조성된 3색 외씨 버선길을 전국 최고의 명품길로 자리 잡도록 가꿀 것"이라며 "시인의 시흥이 절로 느껴지고, 민족수탈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생명력으로 살아나는 길이 되도록 만들어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로 자리매김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영양'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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