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자고 났더니 유명인이 됐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대로 사람을 허공에 띄워놨고, 함부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 굴하기는 싫었다. 가급적 귀는 닫고 그 자신의 목소리에만 충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명 연예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평범한 대구의 한 고등학생 이야기다. 지난해 8월 케이블채널의 '슈퍼스타K 2'에 출연했다 탈락한 '힙통령'(힙합 대통령의 줄임말) 장문복(17'대구제일고 1년) 군은 프로그램을 즐겨봤던 이들 사이에서는 "아, 걔!"라고 알아볼 만큼 유명인사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패러디물도 꽤 보인다. 인터뷰 날도 사진 촬영 모습을 지켜본 커피숍 주인이 "혹시… 힙통령 아니세요?"라며 알은체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명해진 게 그리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악플에 시달렸고, 약간의 마음고생도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이제는 "언론, 방송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요?"라고 시크하게 이야기하는 그에게서 나이보다 조금 더 자란 성숙함이 엿보였다.
◆외계어랩? 속사포랩?
문복 군이 화제가 됐던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희한한 랩 때문이었다. 그는 힙합 음악 마니아이면서 장차 프로듀서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이다. 슈퍼스타K 오디션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당시 한창 '속사포 랩'으로 뜨고 있던 그룹 아웃사이더의 '스피드 레이서'(Speed Racer)를 엄청난 속도로 불러댔다.
하지만 기대에 찼던 그의 도전은 심사위원들의 냉정하고 시니컬한 평가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심사위원들은 낄낄대며 아주 비웃는 태도까지 보였다. "외계어예요? 아르르르 소리밖에 안 들려"라면서 아주 배를 잡고 깔깔깔 넘어갔다.
사실 그가 부른 것은 정말 빛의 속도였다. 'Check' 하는 외침 외에는 정말 단어 하나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네티즌들 역시 "도저히 자막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라며 각종 합성을 통한 패러디물과 UCC를 만들어내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에게 '힙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이후 그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자 케이블방송사는 그를 비롯해 그간의 화제를 불러 모은 출연자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10월 '슈퍼시상식'을 열면서 그에게 '크레이지 보이스 상'을 수여했다.
그렇다고 그의 랩에 대해 다들 뚱한 반응만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슈퍼시상식에서 함께 무대에 섰던 랩퍼 아웃사이더는 문복 군에게 "네 목소리가 특이하니까 그것을 잘 살렸으면 좋겠다"며 "사람들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사도 직접 쓰고 열심히 해라"고 응원했다. 이후 문복 군은 아웃사이더와 함께 서울 홍대 클럽에서 한 번 더 무대에 섰다.
또 힙합가수 타이거JK도 기대감을 표시했다. 타이거JK는 당시 방송을 보고 자신의 트위터에 "소름 돋는다. 한국에 이런 친구가 또 있었다니 욕심 난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화제, 그 뒤엔…
방송 후 문복 군은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뀌어 버렸다. 그의 표현으로는 '반에서조차 존재감 없었던 조용한 아이'가 어느 날 네티즌들의 화젯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화제도 화제 나름. 그에게는 영광이면서 상처이기도 했다.
온라인 공간을 뜨겁게 달구며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자 담임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전 정말 조용한 아이거든요. 말도 별로 없는 편이고, 그래서 친구도 많지 않아요. 그런 제가 갑작스럽게 TV에 등장하니 담임 선생님께서도 많이 놀라셨나 봐요."
늘 혼자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문복 군.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한번 펼쳐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보다. 앞뒤 재지 않고 일단 오디션에 도전을 했다. 하지만 그런 도전이 그에게 '기쁨'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너무 비웃는 심사위원들의 태도에 네티즌들까지 합세하면서 한순간 놀림거리로 전락한 측면도 있었다. 상처를 입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남들의 혹평에 신경 쓰진 않아요. 그것보다는 내가 왜 그랬을까를 많이 생각했습니다"고 했다. 긴장 탓이었을까. 후에 자신이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들이 자신의 입에서 내뱉어진 것을 보고는 많은 반성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을 빨리 하는 속사포 랩이라 할지라도 전달력 없는 랩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데 대해 그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당시 무대에서 그렇게까지 발음이 불분명한 줄은 미처 몰랐어요. 제가 어떤 상태로 노래를 했는지 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많이 속상했죠. 그래서 후에 방송사에서 다시 한 번 출연을 제안했을 때 흔쾌히 응했던 것도 제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을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편집 논란 발언
최근 문복 군의 이름은 다시 한 번 언론에 등장했다. 그가 출연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편집' 발언 때문이었다.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이 언론을 통해 기사화가 된 것이다. 슈스케 3에서 톱10에 합류했던 예리밴드 리더 한승오가 조작편집을 지적하며 합숙소를 무단이탈하고 자진하차하면서 편집 방식에 대한 논란이 빚어진 데 대해 문복 군이 홈피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이것이 언론을 통해 일파만파 확산돼 버렸다. 당시 그는 글을 통해 "제가 시즌 2 나가 봐서 아는데 인터뷰 때 좋은 뜻으로 얘기한 것을 자기들 멋대로 저에게 아무런 양해 없이 전혀 다르게 편집한 것 맞다"고 적었다.
문복 군은 "또다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돼 재밌었다"며 "자기 의견을 감춰두기보다는 당당하게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사실 그는 이 '편집'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비난이 아닌 당부였다. "이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이잖아요. 평범한 이들인 만큼 이들에 대한 제작진의 배려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방송의 속성상 재미도 추구해야 하고, 감동도 추구해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시청자들 보기에 눈살 찌푸릴 만한 장면들을 모아서 방송에 내보내면 그 출연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심정은 상황에 처해본 사람만이 알 겁니다. 지금껏 여러 번 조작편집 논란이 있었던 만큼 상처를 받은 이들도 있을 거예요."
◆멋진 꿈을 품은 10대
오디션을 계기로 요즘 그에게는 간혹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무대에 올라가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무대 위에 섰을 때 몸을 감싸는 자신감과 그 환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무대에 선 느낌을 묻는 기자의 말에 "너무 좋아서 어떤 말로도 표현을 못 하겠어요. 너무 좋은 건 저만 알고 싶은 그런 욕심이 있잖아요"라고 하는 걸 보면 정말 그에게는 '끼'와 '열정'이 꿈틀거리나 보다.
지금은 매주 토요일마다 TBC 라디오 '공태영의 매직? 뮤직!'에 가요 순위 차트를 정리해 주는 고정 출연자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길을 가다가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평범하게 생겼잖아요. 대신 요즘도 고등학교 축제나 이런저런 공연을 통해 가끔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기는데 '힙통령'이라고 소개하면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세요.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제가 워낙 숫기가 없다 보니 잘 대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문복 군은 힙합 음악이 좋은 이유가 비트나 리듬 박자를 들었을 때 음악을 만든 이의 색깔까지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의 상처가 있었지만 음악에 계속 매진하고 싶은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또다시 오디션에 도전하는 일요? 정말 재미'가십을 추구하는 방송보다는 진실성 있는 그런 오디션이라면 꼭 참여해 보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으니까요."
사실 처음 문복 군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너무 흔쾌히 응해와 "혹시 유명세를 노리는 치기 어린 학생 아닌가"라는 조심스런 생각도 했다. 미니홈피 발언을 통해 언론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난 뒤라 더욱 그런 선입견을 갖게 했다.
하지만 문복 군은 그 또래 친구들보다 자신의 생각이 확고했고, 성숙한 생각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가 수많은 악플들을 견뎌낼 만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학생이어서 천만다행이다 싶었고 충분히 비상할 만한 '그릇'을 갖춘 것 같아 희망이 보였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에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깃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흐뭇한 상상을 해본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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