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배신의 계절

"왜 여기는 불어터진 라면과 김밥만 끼고 있는지 모르겠네?" 2002년 대통령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날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기자실에서 아침 요기를 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청소 아줌마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이다. 기자가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그 아줌마 대답이 이랬다. "이회창 총재 참모들이 있는 사무실에는 전복죽, 잣죽이 지천이고 어떤 때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데…." 입맛이 떨어진 기자는 기사 마감 후 이 총재의 최측근 참모인 한 의원을 만나 "아래와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이런 자세로는 절대로 승리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의원은 잘 알겠다고 했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기자의 악담(?)대로 이 총재는 패배했다. 다음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그 의원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 의원과 이 총재 옆에 있던 그 많은 참모들 모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 총재에게 등을 돌렸다.

"갸가 왜 그런다냐?" 김대중 정부 후반기 민주당 정풍 운동을 주도하던 정동영 의원이 권노갑 고문의 2선 퇴진론을 제기하자 권 고문이 보인 반응이다. 그는 정 의원을 매우 아꼈다. 그래서 '스타 앵커' 출신이란 엄청난 상품성 때문에 서울 강남이나 서초 등 이른바 격전지에 내보낼 수도 있었지만 가장 안전하게 정 의원 고향에 공천을 했다. 이런 배려로 정 의원은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 화려한 데뷔를 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정 의원이 권 고문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했다. 정 의원은 2007년 대선에 앞서 열린우리당을 깨고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가 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그와 똑같이 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국회 본회의장 통로에 꿇어앉아 통곡했고, 열린우리당 의장을 두 번이나 지낸 그였다.

지금 한나라당에도 '배신의 계절'이 돌아왔다. 쇄신파를 자처하는 초선 5명을 포함, 의원 25명이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對)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편지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 중에는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한 의원도 들어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들이 이 정부의 성공과 한나라당의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이 왜 배신의 칼을 빼들었는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배가 침몰하면 쥐새끼부터 먼저 도망간다고 했던가?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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