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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붕괴 20년 ①거인은 어떻게 무너졌나

소련붕괴 20년 ①거인은 어떻게 무너졌나

1917년 볼셰비키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등장한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은 냉전시대 공산권의 맹주로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글로벌 강자로 군림해왔다.

이런 '거인' 소련은 70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와해됐다.

1991년 12월 8일. 20년 전 옛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종말을 향해 첫 발짝을 뗀 날이다.

옛 소련의 핵심국가인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3국 정상은 벨라루스의 '벨로베슈스카야 숲'에 있는 별장에 모여 소련을 해체하고 느슨한 형태의 국가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 서명 18일 만인 같은 달 26일 소련의 의회라 할 최고회의는 소련의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이날 사망했다.

소련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와 캅카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합쳐 1922년 탄생했다. 하지만, 70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 붕괴의 서막 = 소련 붕괴의 원인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다양하다. 그러나 40여 년간 미국에 냉전으로 맞선 거인이 무너질 수 있다는 조짐은 1988년 처음 나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 견해다.

1985년 권좌에 올랐던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집권 직후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을 기치로 변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변혁은 조금 늦었다. 군사력 경쟁을 통한 냉전으로 소련 체제를 지탱하기에 경제가 파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9년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포기하고 1988년 철군 결정을 내렸다.

글라스노스트로 정치범 석방과 언론 자유 등이 이뤄지자 중앙 정부 권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을 보조하기 위한 정부 재정지출이 급증하면서 1989∼90년 정부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처했다. 생필품을 배급받으려 선 줄은 수km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 국제 원유가를 낮게 유지함으로써 원유 수출로 지탱하던 소련의 재정을 파국으로 몰아갔다는 분석도 있다.

냉전과 정치적 억압으로 간신히 지탱하던 공산당 체제는 계획 경제의 실패와 군비 경쟁 탓에 쌓인 '피로 균열'을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몰렸다.

◇동유럽 민주화…연방국 탈퇴 = 소련의 개혁과 개방의 영향을 받아 1989년 동유럽 여러 나라에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고 공산당 정권은 잇따라 무너졌다.

동유럽 민주화로 소련내 개별 공화국은 제각각 주권을 선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 공화국은 연방 탈퇴를 허용한 소련 헌법 72조를 근거로 독립을 거론했다.

고르바초프는 더 앞서 나갔다. 1990년 4월 각 공화국 주민이 국민투표에서 3분의 2가 찬성하면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게 한 법안을 통과시켜 연방 해체의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러시아 공화국도 이듬해 3월17일 연방 탈퇴를 두고 국민투표를 했으나 안건은 부결됐다. 투표 부결은 '연방강화' 여론을 일으켜 총 15개 연방공화국 가운데 러시아를 포함해 9개 공화국이 느슨한 형태의 새로운 연방을 구성하는 '신연방조약'을 이끌어냈다.

◇쿠데타 실패가 결정타 =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과 국방장관 등 공산당 보수 강경파는 1991년 8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되돌리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의 목적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펴온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보수파의 세력을 회복함과 동시에 개혁 세력이 추진하던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는 데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민은 쿠테타 세력이 배치한 장갑차에 맨손으로 맞서며 격렬히 저항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연방 대통령은 의회 의사당 건물을 봉쇄한 진압군의 탱크 위로 올라가 개혁에 맞서려는 쿠데타 세력을 비난하며 전 국민적 저항을 촉구했다. 결국 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쿠데타가 성공했다 해도 소련의 해체는 막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소련의 경제 파탄과 일부 공화국의 독립 움직임 속에서 막 등장한 민주세력은 역량이 모자라 소련 해체를 막을 힘이 없었다는 얘기다.

쿠데타 사건 뒤 고르바초프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했다. 그해 9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해 연안 3국이 소련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갔다.

석 달 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레오니트 크라프축 우크라이나 대통령, 스타니슬라프 슈슈케비치 벨라루스 최고회의 의장 등 3국 정상은 벨라루스 서부 벨라베슈스카야 숲에 있는 소련 지도부 별장에서 소련의 종말을 고하고 '독립국가 연합'(CIS) 창설에 서명했다.

이어 12월 21일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를 뺀 14개국 대표들이 CIS 창설을 알리는 알마티 의정서에 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25일 소련대통령 직을 사임했고 권력을 보수파 쿠데타 저지의 주역인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넘겼다.

소련 최고회의는 26일 마지막 회의에서 소련 해체를 공식 선언했고 붉은색 바탕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 국기가 크렘린궁에서 내려졌다.

소련의 붕괴, 아니 해체 결정 이후 러시아는 소련의 합법적 승계국으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았다. 군과 치안기구도 물려받았다. 물론 소련의 외채도 떠안았고, 대외 자산도 모두 승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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