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뿌리풀-윤 중 리
피뿌리풀. 팥꽃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뿌리가 핏빛으로 붉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한라산과 황해도 이북에 분포한다. 주로 만주와 몽골의 풀밭에서 서식하는데, 여름에 홍색의 꽃을 피운다. 꽃이 필 때는 먼저 빨간 꽃망울을 많이 맺고 있다가 바깥쪽부터 하얀색을 띠며 피기 시작한다. 안쪽의 꽃이 필 무렵 바깥쪽의 흰색 꽃이 점점 선홍색으로 변해가다가 안쪽의 꽃이 피어나고, 바깥쪽의 꽃이 더 열리면서 서서히 핏빛으로 익어간다.
이 피뿌리풀을 나는 내몽골의 초원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 일행은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초원에 앉아 있었고, 거기 잔디처럼 생긴 풀들 사이에, 그보다는 약간 키가 큰 피뿌리풀들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마침내 옆자리에는 야생화 전문가인 여류시인이 앉아 있어서 피뿌리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이름과 함께 달빛에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낮에는 전통생활을 하고 있다는 몽골 마을을 찾아간 자리에서 다시 피뿌리풀들을 만났다. 초원이란 것도 우리가 찾아가면서 상상했던 그런 초원은 아니었다. 거의 사막에 가까운 평원에 잔디 같은 풀들이 엉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 거기에서 만난 피뿌리풀들은 살아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땡볕에 시달려 몸을 뒤틀면서 고통을 참고 있는 형상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서 엉뚱하게도 우리나라가 피뿌리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북아시아 한쪽 귀퉁이에 겨우 붙어서 긴 세월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한때는 국권을 상실하고 남의 노예가 되기도 했고, 거기에서 벗어나자 금방 또 당해야 했던 전쟁의 참화, 국토의 분단과 이념의 갈등, 가난과 질곡 속에서 연명해 온 이 나라 이 겨레가 곧 뿌리에 핏물 든 피뿌리풀 아니랴.
베이징 수도공항을 이륙하여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계속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밥술이나 먹을만하다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들, 나라의 안위는 안중에 없고 마치 진흙밭에서 뭐 싸우듯 싸워대는 정치인들. 향락의 늪에 빠져 이기의 악어에게 발목을 물린 젊은이들. 국론은 사분오열, 도덕과 윤리는 이미 쓰레기통 속에 던져진 지 오래,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되어버린 사회. 권모와 술수를 지혜라 하고 아부와 아첨을 능력이라고 부르는 나라. 피뿌리풀은 뿌리에 핏물 든 사연이나 잊지 않아야 하는데, 이 나라 이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렸는가?
비행기 창밖으로 저녁 해가 피뿌리풀의 뿌리빛인듯 빨갛게 지고 있는 것을 내다보자 나는 눈시울이 울컥 뜨거워졌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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