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992년 포철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뒤를 이은 역대 회장은 지금까지 모두 6명. 일명 청암의 남자들이다. 청암이 별세함으로써 새삼 그들과의 애증 관계가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다.
청암이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황경로 부회장이 1992년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황 부회장은 청암의 복심을 읽는 측근 중의 측근으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는 육사시절에 청암과 처음 만나 대한중석과 포철을 함께 일으킨 오랜 동지였다. 오래전부터 청암은 황 부회장을 후계자로 꼽고 경영수업을 체계적으로 시켰다. 황 회장은 이번 장례식에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1년 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영삼과 대립각을 세운 청암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밀려났다.
김영삼은 정명식 부회장을 후임으로 앉혔다. 당시에는 포철이 민영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마음대로 회장을 임명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이 취임하면서 청암의 측근이었던 황경로 전 회장과, 박득표 사장, 유상부 부사장이 포철에서 물러났다. 정권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1년이라는 짧은 재임기간을 지낸 정 회장은 김영삼 정부의 포철 장악을 위한 과도기 회장인 셈이었다.
김영삼은 포철에 남아 있는 청암의 잔재를 말끔하게 지워낸 뒤 당시 경제기획원장관 출신인 김만제를 1994년 회장으로 앉혔다. 김만제 회장은 4년의 세월을 정권과 같이 했다. 김 회장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정권의 안정적인 뒷받침으로 인해 포철의 글로벌화와 복지향상 등에 전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기업보다 열악한 급여를 받고 있던 포철이 김 회장 재임 시부터 급여가 대폭 향상돼 직원들부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직원들은 당시가 좋았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김 회장의 뒤를 이은 회장은 김영삼 정권 때 떠났던 유상부 부사장. 그는 청암의 도움으로 1998년 포철 회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는 포철에서 물러난 뒤 1996년 12월부터 1998년 3월까지 일본삼성중공업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때는 청암이 김영삼 정권의 눈 밖에 나 일본에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유상부는 일본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청암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했다. 그러던 청암이 1997년 포항북구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 김영삼 정부에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고 자민련 총재를 지내는 등 정치적인 주가가 치솟았다. 이어 1998년 김영삼 정권이 끝나고 김대중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DJT연합 정권 창출에 공을 세운 청암의 후광으로 김만제에 이어 1998년 회장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유 회장은 2002년 포철의 사명을 포스코로 변경한 인물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청암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유 회장이 재임 중 포철의 주식에 대해 스톡옵션을 행사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자신은 포철 설립 후 창업주인데도 단 한주의 주식도 갖지 않았는데 반해 유 회장이 스톡옵션을 행사하려 한 것을 청암은 못마땅해했다.
유 회장의 뒤를 이어 이구택 사장이 2003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 회장은 1969년 공채 1기로 채용된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청암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 회장은 비교적 순탄하게 포스코를 이끌어 6년이라는 최장수 회장 재임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는 아픔을 겪었다.
이어 정준양 회장이 2009년 취임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청암의 남자들은 현재 모두 생존해 있으며 전직 회장의 자격으로 대부분 청암의 빈소를 지키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고 있다.
포항'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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