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뮤직토크(56)]나는 노래한다, 정태춘(하)

서정과 토속, 참여와 시대정신 대변

2집과 3집이 실패를 거치는 동안 정태춘을 가장 괴롭힌 일은 노래 부를 무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1980년대 방송 환경은 컬러TV의 시작과 함께 화려해진다. 그저 노래만 부르던 가수들은 TV 프로그램에서 요구하는 쇼맨십을 보여야 했는데 정태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소속 음반사마저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몇 년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19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정태춘은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이름을 각인시키게 된다.

'떠나가는 배'가 수록된 4집 앨범은 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떠나가는 배'는 라디오와 음악감상실에서 매시간 흘러나올 정도의 인기였고 5집 '북한강에서'도 신드롬을 일으키지만 정작 본인은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성공에 안주해 시대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정태춘은 참여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정태춘을 콘서트 무대보다 거리와 집회 현장에서 더 자주 보게 되는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공개한 두 장의 앨범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한국모던포크를 새롭게 규정하는 앨범인 동시에 한국대중음악계에 정태춘을 영원히 새기는 계기가 된다.

두 장의 앨범은 1996년 6월 7일 전까지는 불법 음반이었다. 1933년 일제의 '레코드 취체 규칙'으로부터 시작된 사전심의제는 60년이 넘도록 한국대중음악계를 괴롭혔다. 사전심의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자체 심의를 하는 일에 익숙했고 지레 겁을 먹는 일이 허다했다. 정태춘은 사전심의를 거부하며 두 장의 앨범을 심의 없이 공개했고 1994년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정태춘은 끊임없이 사전심의제 폐지를 요구했고 결국 1996년 6월 7일 음반 사전 심의는 완전히 폐지된다. 이날을 기념해 정태춘을 비롯한 아티스트들은 발표일부터 3일 동안 '자유'라는 이름의 공연을 열기도 했다.

서정과 토속, 참여와 시대정신으로 대변되는 정태춘의 음악은 아쉽게도 합법적인 온라인 음원 서비스에서는 볼 수 없었다. 저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합리적으로 유통되는 온라인 음원 유통 구조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고 두 장의 앨범을 제외한 모든 앨범이 판매가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부터 온라인 음원 서비스에서 정태춘을 만날 수 있다. 팬들의 끊임없는 재발매 요청으로 대표곡을 모은 '발췌곡집1'2집'과 몇 장의 앨범을 온라인 서비스하기로 한 것이다.

비틀스의 음원을 아이튠스를 통해 서비스하면서 "내일은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라고 했던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정태춘의 음악이 온라인에서 서비스된다는 것도 한국대중음악계에서 마찬가지다. 다만 대중음악이 유의미한 텍스트로 인정받지 못하는 풍토에서 정태춘의 음악이 온라인에서 서비스되는 것을 대중들은 의미 있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권오성 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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