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도전의 조카 정기준이라는 가상인물이 등장해 "왕이 꽃이라면 재상은 뿌리이며 꽃은 시들면 꺾으면 되지만 뿌리가 썩으면 나무가 죽는다"며 삼봉 정도전의 유지를 받드는 밀본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이도(세종)에게 맞선다. 주인공 이도의 애민사상과 한글 창제의 의미 등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레 얼굴조차 한 번 나오지 않은 삼봉 정도전은 '사대부만을 위하는 엘리트주의자'의 정신적 수괴로 매도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저자는 '14세기를 살았던 21세기적 인물'로 정도전을 바라본다.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고, 마르크스보다 더 혁명적이며, 마키아벨리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조선을 만들어 갔다고 평가한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도전이라면 (한글을 창제하려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는 세종의 독백은, 정도전이 구현하려 했던 이상적 조선이 세종 때 가장 잘 실현됐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면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연 것은 이성계의 리더십이나 인망을 좇아간 게 아니었다. 이성계가 고려 말 어떤 권문세가와도 관련이 없으며, 충분히 고려를 위협할만한 사병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李)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도참사상에 알맞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충의를 따르는 성리학자 정도전의 역성혁명은 '맹자'의 철학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정도전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학자 맹자는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임금은 이미 임금이 아니므로 죽여도 좋다"고 말했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통치권은 하늘의 명령, 즉 '천명'으로부터 부여되므로 천명을 떠난 통치권은 소멸되고 다른 천명이 내려진다는 것이 삼봉의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백성의 소리가 '천명'이었다. 그런데 귀양살이 중인 삼봉에게 맹자를 소개한 사람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삼봉의 민본사상은 관념이 아닌 현실 속에서 자라났다. 철거민 신세로 5년 동안 세 번의 강제 이사를 당하고, 10년 동안 실업자로 전전하면서 백성들의 민생고를 처절하게 경험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복종보다는 백성의 삶을 더 무겁게 여긴 삼봉에게 고려왕조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제거해야할 대상일 뿐이었다.
삼봉의 민본사상은 '조선경국전' 집필을 통한 제도정비와 언로의 개방, 실업자 구제를 위한 농업장려, 왕의 독단 견제 등 태종'세종의 업적으로 알고 있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정도전이 기틀을 놓은 것이다. 세종 때 변계량이 조선 최고의 병법가로 정도전을 꼽았을 정도로 군사문제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요동 수복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불태웠지만, 역적으로 몰려 생을 마감함으로써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500여 년을 묻혀 지냈다.
조선 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아, 그렇지! 개국초 이 건물들에 경복궁, 그리고 근정전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인 사람이 정도전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이 미치면서 무덤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이 진정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대하 드라마 '삼봉 정도전'이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릴 수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다.
저자는 "삼봉 정도전을 다산 정약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민생 정치인으로 존경해 왔지만, 다산과 달리 삼봉 선생은 오늘날까지 왜곡된 평가 속에 묻혀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부족한 능력을 알면서도 이 책을 쓰게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경북 청도 출생인 저자는 경북대를 졸업하고, 제17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지식경제부의 요직과 대구시 정무부시장, 한국산업단지공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성에너지 경영지원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96쪽, 1만6천원.
석민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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