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주요 선진국에서 시작된 재정위기가 전 세계 경제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분위기를 간파하고 '비상 경영'에 돌입하는 등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일부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경기불황이 길게는 10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현재 상황은 지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공교롭게도 대기업 오너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2030년 국내총생산(GDP) 5조 달러, 1인당 GDP 10만 달러,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는 야심 찬 장기 비전을 내놨다. 비전처럼 실현될지,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크고 작은 변수가 적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목표를 내세울 만큼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낙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겠다.
필자는 한국경제가 지난 일련의 위기 속에서도 좌초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을 이룩해 온 저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재계의 최고경영자(CEO)층에 불어 닥친 '인문학 열풍'에 주목하게 된다. 경영 환경이 복잡해지고 갑작스런 위기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통계적 분석 기법이나 금융공학, 기술 위주의 경영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이 열풍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삼성경제연구소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CEO의 97.8%가 '인문학적 소양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기업교육 전문기업인 휴넷은 이종산업 간 융합이 빈번해지고 인간 본성을 꿰뚫는 창의력을 토대로 한 비즈니스가 빛을 발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의 적극적인 등용을 추천하고 있다.
사실 현대적 의미에서 '인문학 경영'의 역사는 짧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면 카네기나 록펠러 같은 대부호 가문이 자녀들에게 철저한 인문학 교육을 시키는 전통에까지 이른다.
근자에는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잡스는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든 것은 애플이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경쟁업체인 구글도 올해 신규 채용자 6천 명 중 5천 명을 인문학 전공자로 충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텔은 아예 연구소를 개설해 인간의 소통 방식에 대해 집중 탐구하고 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의 전공은 다양하다. 각급 엔지니어는 물론, 문화인류학자, 심리학자, 소설작가까지 다양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페이스북을 개발한 마크 주커버그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연결한다'는 상상력만으로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그는 약관 20세에 이미 공학적 기술력이 아닌 인문학적 통찰력이 자신의 원동력임을 깨달았다고 설파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이어령 박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창조적 상상력"이라고까지 했다. 허경 고려대 연구교수도 "우리 기업이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서구 선진국이 짜놓은 판을 뒤흔들 능력은 없다는 냉정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며 '인문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우울하다. 일부 대기업에서 인문사회 계열 신입사원의 채용을 늘리고 있다지만 대세는 경제경영 전공자들이다. 심지어 지방대학 10여 곳에서는 철학과가 사라졌다. CEO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매료는 '경영'을 위한 부수적인 '교양' 정도에만 머물지 않느냐는 의심이 들 만하다.
눈앞에 닥친 세계경제의 위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숨어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그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관습, 전통, 문화 등 그동안 경영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치부됐던 것들이 기업 경영의 핵심 요소로 도입되고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 마케팅의 대상이 되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잠재적 고객, 더 나아가 인간사회에 꼭 필요한 기업이야말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 수 있다는 자각을 부른다.
이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갖고 역사적, 문화적 안목을 깊게 하는 공부가 미래 경영 예측에 유용하다는 인식의 확대가 필요하다. '경영 공학'을 뛰어넘는 '경영 철학'이야말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김아미/봉산문화회관 공연기획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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