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년간 종이꽃 연구 김태연 교수 대구서 '지화'전

신정왕후 팔순연 의궤 참고 '궁중상화' 최초 재현

사람들은 실로 오래전부터 종이로 꽃을 접어왔다. 꽃은 신에게 바치는 헌화였다.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꽃은 정성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운 저승의 영혼을 부를 때, 꽃은 '다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영혼은 꽃을 타고 이승에 나타나 그리운 이들과 만나고, 다시 꽃을 통하여 사라졌다. 종이꽃은 적어도 우리 민족에게 신앙 같은 그런 존재였다.

김태연 대구대 실내건축디자인학과 교수는 알록달록한 종이꽃에 반해 30여 년간 종이꽃을 찾아 전국으로 다녔다.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하던 그는 이제 점점 사라져가는 종이꽃을 연구하는 유일한 학자다.

서울 꼭두박물관에서 사진작가 구본창과 2인전을 열고 있는 김 교수는 대구에서 22일까지 갤러리제이원에서 '김태연의 지화'전을 연다. 2006년 이후 6년 만의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 궁중지화, 불교지화, 무속지화, 생활지화 등을 선보인다. 종이꽃에도 무슨 종류가 이렇게 많을까 싶지만, 종이꽃의 역사는 의외로 깊고 넓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사계절 꽃이 없었잖아요. 옛날 궁중에는 가객들의 옷깃에 꽂는 꽃과 식탁을 장식하던 꽃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을 정도로 꽃 문화가 발달했어요. 진연이 베풀어질 때마다 꽃일장이에게 갖가지 꽃을 만들도록 해서 사용했죠. 벼슬에 따라 내려오는 꽃이 달랐어요."

궁중을 장식하던 화려한 꽃은 모시, 비단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종이꽃이 가장 흔했다. 조선시대 각종 의례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지화 덕분이었다. 하지만 궁중에서 사용하던 종이꽃의 원형을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김 교수는 1999년 조선 신정왕후의 팔순잔치를 기록한 궁중의궤 그림과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궁중상화를 재현해냈다. 궁중상화를 재현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의 궁중상화 19점은 미술저작권에 등록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꽃은 굿판, 절에서의 제사 등에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였다. 옛날부터 '꽃방'이라고 하여 전통시장이나 마을 장날엔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기 위해 '꽃일'을 하는 전문적인 장인이 존재해왔다.

"꽃일을 하시는 장인들은 나름대로 철저한 원칙이 있었어요. 꽃 만드는 방을 꽃방이라고 하는데, 제사를 앞두게 되면 장인은 아침저녁 목욕하고 꽃방을 드나들지요. 절에서는 아예 금줄을 쳐놓고 꽃 만드는 스님만 들어갑니다. 종이를 타넘어도 절대 안 됩니다. 육식도, 부부관계도 철저하게 금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꽃을 만들지요."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종이꽃이지만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마을굿과 더불어 종이꽃의 전통도 점차 사라져갔다. 장인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문화재로 지정된 행사 굿판에서조차 중국 조화를 사용할 정도로 종이꽃의 소중함을 알아봐 주는 이가 없다.

김 교수에 따르면 종이꽃을 접을 수 있는 이는 전국에 30여 명에 불과하다. 김 교수는 1980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20여 년간 꽃일 하는 장인이 있다는 풍문이 들리면 배낭을 메고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배낭을 메고 시골 오일장을 헤매던 그는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하고, 차비가 떨어질 때까지 무작정 전국을 돌아다녔다. 종이꽃을 접던 몇몇 스님들은 종이꽃의 가치를 알아주는 김 교수에게 종이꽃 접는 도구와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이제 꽃을 접던 장인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래서 꽃을 피워내는 그의 어깨는 더욱 무겁다.

그는 오랜만에 대구에서 선보이는 전시에서 전통 지화와 함께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작품도 선보인다.

선비들이 차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기 위해 꽂았던 일지화(一紙花)를 선보인다. 꽃꽂이는 조선시대 선비의 4대 덕목으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덕목이었다. 소반 위에 소박하게 꽂아놓은 한 가지의 꽃에서 그 꽃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복숭아, 매화, 도라지 등의 일지화를 찻자리 꽃으로 소반 위에 소박하게 전시한다.

종이꽃을 액자에 담아 보여주는 시도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나뭇가지에 꽃과 꽃봉오리를 만들어 붙여 종이꽃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화사하고 복스러운 모란화를 만날 수 있다. 김 교수는 "요즘 사람들이 너무 힘들고 지쳐 있어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을 선보인다"고 말했다.

특이하게도 궁중상화의 일종인 열매화를 선보인다. 임금은 열매화를 특히 소중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다산, 다복을 상징하는 가지, 오이, 유자, 포도, 복분자 등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정년을 앞두고 김 교수가 30여 년간 매달려온 종이꽃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얇은 종이가 손맛에 따라 화려한 꽃송이로 변하는 마력에 이끌려 온 30년의 세월이 종이꽃에 담겨 있어요. 한지의 은은한 질감이 지화의 품위를 더욱 온화하고 소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053)252-0614.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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