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충북 영동 민주지산

충북'전북'경북 만나는 백두대간 정중앙, 쏙 숨겨놓은 '설국의 산'

3개 도(道)를 가장 빨리 돌아보는 방법은? 정답은 민주지산 삼도봉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걸음이 아무리 느린 비(非)준족도 1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 삼도봉이야말로 민주지산이 가진 모든 상징과 정체성이 집약된 곳이다.

민주지산은 행정관할로는 충북 영동, 전북 무주, 경북 김천이 만나는 곳이다. 우스갯소리로 삼도봉 탑에 떨어진 빗물도 사면을 따라 상촌면, 부항면, 설천면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중원을 두고 대립했던 각축장이었고 지정학적으로 영'호남의 날카로운 대립의 기운을 충청이 중화하는 형세를 하고 있다.

국토의 중앙에서 정치의 중심축이자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는 민주지산으로 떠나보자.

민주지산, 한자로는 '岷周之山'으로 쓴다. 아무리 해석해 봐도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민주지산처럼 산 이름을 가지고 세간에 널리 회자된 곳도 드물다. 한자로 쓰는 '민'자도 제각각이다. 네이버 등 포털에도 '민'(珉) '민'(岷) 등 서너 글자가 혼용되어 있다.

예부터 지역 주민들은 이 산의 산세가 민두름하다 하여 '민두름산'이라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 때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민주지산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등 기타 문헌에는 '백운산'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도 있다. 한때 시민단체와 뜻있는 등산인들이 옛 이름을 찾아주자는 캠페인을 편 적이 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근처 덕유산 자락에 백운산이 있어 그곳과 착각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한복판…중부권 눈 산행지=상고대, 고사목, 코발트색 하늘, 탁 트인 전망…. 이른바 겨울 명산의 필수요건이다. 물론 풍부한 적설량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 태백산, 함백산 등 강원지역 명산과 덕유산, 지리산 등 중남부의 고산들이 이 범주에 든다.

고사목의 주요 소재가 되는 주목이 해발 1,200m 이상 산에서만 군락을 이룬다는 점을 감안하면 겨울 명산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 겨울산행은 눈이 풍부한 강원지역이나 1,500m 이상급 고산으로 한정된다.

그 틈새에서 겨울 명산으로 당당히 명함을 내미는 곳이 있으니 이번에 소개할 민주지산이다. 눈 산행 코스로는 비교적 낮은 1,200 m급에 고사목도 없는 이 산이 겨울 명산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백두대간 줄기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조망터로서의 입지 때문이다.

주지하듯 진부령에서 기맥한 백두대간은 소백산을 뻗어 내려오다가 추풍령에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민주지산은 대간의 터미널이자 전망대인 셈이다. 대간산꾼들도 괘방령 능선에 오르면 스틱을 내려놓고 신발끈을 고쳐 맨다.

◆물한리-정상-삼도봉 12㎞코스 인기=등산로는 대체로 영동 쪽 코스가 발달해 있다. 해가 짧은 겨울철에는 물한계곡으로 올라 정상으로 오른 후 석기봉 또는 삼도봉에서 하산하는 일정이 주류를 이룬다.

일행이 찾은 날에도 물한계곡 주차장에는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스는 정상-석기봉-삼도봉을 돌아오는 약 12㎞ 코스를 선택했다. 계곡 입구에 이르자 눈에 덮인 물한계곡이 일행을 맞는다. 물이 차다고 해서 한천(寒泉)이라는 지명이 따로 있지만 한문으로는 물한(勿閑)으로 쓴다. '몸을 한가히 두지 마라'는 뜻. 깊은 산골에서 심오한 경구가 좀 낯설긴 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으로 여기면 족하리라.

20분쯤 진행하면 길은 좌우로 갈라진다. 왼쪽으로 가면 삼마골재를 거쳐 삼도봉으로 오르고 오른쪽은 민주지산과 통한다. 일행은 정상이 있는 오른쪽으로 길을 접어든다.

계곡을 하얗게 덮은 눈은 제법 키를 높여 종아리까지 올라온다. 군데군데 아름드리 낙엽송 군락이 시원한 바람을 날려 산꾼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오르막길을 1시간쯤 오른다. 팽팽해진 종아리 근육이 평지를 갈망할 때쯤 산은 얕은 능선 하나를 펼쳐보인다. 등락이 심한 능선을 30분쯤 오르자 산은 잡목 사이로 정상봉우리를 펼쳐 놓고 북쪽으로 내쳐 달아난다. 순백의 솜털에 쌓인 정상의 상고대는 정오의 햇살을 튕겨내느라 분주하다. 북서쪽으로 설원 위에 펼쳐진 도마령 쪽 풍경이 수묵담채처럼 아름답다.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자 쪽새골 너머 거대한 능선이 근육질 몸매를 드러냈다.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 그곳에 백두대간이 있었다. 괘방령을 넘어온 줄기는 황악산에서 높이 솟구친 후 부항령을 넘어 덕유산 쪽으로 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자연의 서사시는 산맥을 따라 긴 여운으로 뻗어간다.

정상 바로 밑쪽에 대피소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조그만 목조건물엔 안타까운 사연 하나가 전한다. 1998년 4월 이곳에서 야영하던 특전사대원 6명이 갑작스런 추위와 폭설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비극의 현장에 대피소를 세웠다.

◆가야산'속리산'무주리조트 스키장까지 한눈에=산은 남으로 맥을 펼친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 레이스가 다시 이어진다. 바람을 뚫고 1시간쯤 진행한다. 가파른 난간 위에 얹힌 듯한 석기봉이 일행을 맞는다. 암봉은 산객들의 평온을 벨 정도로 날카롭다. 그러나 사방으로 펼쳐진 전망만큼은 단연 최고다.

이웃한 가야산, 속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금오산도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정남쪽에선 무주리조트의 슬로프가 길게 늘어서 있다. 국내 최장이라는 실크로드 슬로프가 선명하다. 사통팔달로 트인 조망을 한 바퀴 돌아보니 이곳이 백두대간의 교차로라는 말이 실감난다.

삼도봉은 석기봉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다. 막 피로가 밀려오는 시점이라 등산객들 대부분은 석기봉 밑에서 물한리 쪽으로 난 탈출로를 택한다. 20여 분쯤 직진하니 눈을 뒤집어쓴 삼도봉 기념탑이 막아선다. 제단 한쪽엔 한 등산팀이 시산제를 지내고 있다. 매년 10월 10일엔 3도의 주민들이 문화교류와 화합을 위한 축제를 연다. 이 작은 공간에 3도의 접경이 맞물렸으니 신라와 백제가 중부권 제패를 위해 이곳을 주목한 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1,100m고지를 오르내리던 능선은 이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10여 분 후 산은 작은 재 하나를 열어 놓는다. 영동과 김천 부항면을 잇는 삼마골재다. 여기서 직진하면 산길은 밀목령을 거쳐 황악산으로 곧장 연결된다. 재에서 왼쪽 길을 잡아 황룡사 방향으로 향한다. 눈길의 작은 결정들은 어느새 붉은빛을 털어내고 있다. 노을에 쫓긴 산꾼들도 귀가를 서두른다. 일찍이 백제와 신라의 병사들이 창을 겨누었을 석기봉엔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바랑을 멘 짐꾼들이 바삐 고개를 오르내리던 삼마골재에도 노을이 깃들기 시작한다. 순백의 산자락엔 어둠이 내리고 이제 3도의 세 마을도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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