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말 바꾸기

언어학의 대가이자 '존경받는' 좌파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는 '말 바꾸기'의 대가이기도 했다. 200만 명이 학살된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원인분석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에게 미국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행의 배후조종자이자 근원이었다. 따라서 킬링필드는 공산주의 정권이 벌인 악행일 수가 없었다. 이런 자기 최면 속에 촘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킬링필드는 미국과 서구의 탓이라는 논리를 일관되게 전개해나갔다. 1단계, "학살 따위는 없었다. 서구가 선동하려고 날조한 것이다." 그러나 학살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오자 2단계로 넘어갔다. "소규모의 살인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캄보디아의 고통은 서구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되어 이용당했다."

하지만 살인은 소규모가 아니라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증거들이 드러났다. 그러자 3단계로 넘어갔다. "처음 생각한 것보다 더 광범위한 살인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범죄로 인해 농민들이 잔혹해진 데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멋진 피날레가 남았다. 모든 진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캄보디아 정권은 학살을 선동적 목적으로 과장하는데서 학살을 적극적으로 저지르는 쪽으로 나아간 CIA의 '승인'을 받았다." 간단히 말해 폴 포트의 반인륜 범죄는 미국이 유도했다는 것이다.(폴 존슨, '지식인의 두 얼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폐기를 공언한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의 말 바꾸기 솜씨도 이에 못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촘스키가 '미국의 악행'이란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말을 바꿨다면 한 대표는 한'미FTA가 필요하다는 신념을 폐기하기 위해 말을 바꿨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15일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국제금융질서의 변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 등 5년 전과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당시에도 전세계가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미 FTA가 굴욕적 외교협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그렇다. 민주당이 그 근거로 든 '독소조항' 10개중 9개가 노무현 정부 때 타결됐다. 그런 '굴욕'을 당시 총리였던 한 대표는 '우리 경제의 성장 모멘텀'이라고 치켜세웠다. 한'미 FTA를 반대하려면 이런 '말빚'부터 청산하는게 먼저라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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