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삼척 덕항산

삼수령~구부시령 40리 길 '雪雪' 그래도 '눈 호강'에 맹추위 잊어

지리산 웅석봉과 설악산 진부령을 잇는 백두대간의 도상(圖上) 거리는 672㎞. 필드에서 실제 진행거리는 1,200㎞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간 기준, 등반거리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보통 35~60회 이상 출정해야 종주가 가능하다. 완주에 대략 2, 3년은 걸린다. 긴 구간을 구획하고 점(點)들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한 번 산행에 20㎞를 넘기는 건 보통이다. 명승, 비경 탐방을 위주로 짜여지는 일반 등산과 달리 대간 길은 정해진 길을 비타협적으로 걷는다. 유흥, 오락과는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관광, 유람의 설렘도 없는 재미없는 길, 이 길을 왜 나서는 걸까. 지역의 한 대간종주 팀을 따라 덕항산으로 떠났다.

◆삼수령~건의령~덕항산 종주 15㎞ 일정=K산악회 백두대간종주팀. 지연도 친소(親疎)도 흔한 학연도 없다. 150여 명의 각계각층의 회원들이 모였다. 오직 '산'을 공통분모로. 목표는 백두대간 종주. 매월 2회씩 꼬박 2년 2개월을 달리기로 작정했다. 2009년 3월 지리산 웅석봉에서 첫 레이스를 시작한 이래 2년여를 돌아 어느덧 종반부에 이르렀다. 오늘은 그 47번째로 삼척 덕항산을 오르는 날, 일정은 삼수령~건의령~푯대봉을 돌아 구부시령~덕항산으로 가는 코스. 도상거리만 15㎞.

오전 6시 40분, 대구를 출발한 버스는 오전 11시쯤 등산로 입구인 삼수령에 도착했다. 삼수령은 이름처럼 세 강의 물줄기를 가르는 고개. 이 고개의 경사면을 따라 한강, 낙동강, 오십천이 발원한다. 들머리에서 인증 샷을 찍고 바로 산행에 나섰다. 오늘 산행 가이드로 나선 정연섭(57'대구시 북구 읍내동) 대장은 "평균 50㎝ 이상의 심설(深雪)인데다 결정이 가루처럼 부서지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무척 클 것"이라며 장비 점검과 체력 안배를 거듭 당부했다.

일기예보대로 눈은 거의 무릎까지 차올랐다. 모처럼 눈(雪)호강에 경쾌하게 내딛던 스텝은 10분이 안돼 게걸음 모드로 망가져 버렸다. 더구나 잡목이 우거져 가지를 헤치고 나가느라 손까지 무척 불편했다.

삼수령~건의령 구간의 핸디캡은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능선들. 3령(嶺) 3재 3치(峙)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 오르내림이 끝없이 반복된다. 2시간여 만에 6.7㎞ 구간을 힘겹게 끝내고 건의령에 도착했다. 38명 전 회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자리에 모였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비극 서린 건의령=건의령은 삼척 도계와 태백 상사미동을 잇는 고개. 몇 해 전 고개 밑으로 건의령 터널이 뚫리면서 예전 교통로의 기능은 퇴색해 버리고 이젠 대간꾼들의 휴식처로 자리 잡았다.

지명 유래도 재미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되자 분개한 고려의 신하들이 건(巾)과 의(衣)를 모두 버리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 공양왕은 원명(元明) 교체기에 이성계에 의해 궁에서 추방된 후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삼척의 궁촌에서 살해되었다.

고려 왕조의 비운이 서린 곳. 바람도 잠시 숨을 고른다. 길옆 적송의 푸르름에서 고려 유신들의 충절을 헤아릴 뿐. 고개에서 식사를 마친 일행은 덕항산을 향해 스틱을 내딛는다. 건의령~정상구간은 우리 팀이 오늘 첫 산행, 덕분에 러셀(눈다지기) 부담까지 고스란히 안게 되었다.

건의령에서 컨디션이 안 좋은 네 분이 종주를 포기했다. 이분들은 후에 이곳을 다시 찾아 미답(未踏)구간을 이어야 한다. 힘이 좋은 정 대장과 이병호(50'대구시 두산동) 씨가 맨 앞에서 눈다짐을 하고 나머지 일행이 발자국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른바 대열산행. 회원들은 처음 접해본 산행법에 신기해했다. 물론 그 즐거움 뒤에는 선두조의 숨가쁜(?) 수고가 있다. 지리산 종주를 8시간대에 끊는 정 대장도 "3분 휴식"을 수시로 외치며 호흡을 조절했을 정도.

푯대봉에서 인원 점검과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구부시령을 향해 출발했다. 더욱 거세진 바람을 뚫고 힘든 레이스가 다시 시작됐다. 종아리를 덮던 눈은 이제 무릎까지 차올라왔다. 일행의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이 구간이 '다람쥐도 눈물 흘리는 길'이라는 누군가의 코멘트가 산행 내내 팀의 화두(話頭)가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눈길도 대간꾼들의 기세에 눌려 반(半) 허리를 내준다. 구부시령 문턱에 이를 즈음 해는 서쪽으로 길게 몸을 누였다. 해시계 침(針)처럼 길게 늘어선 나무 그림자를 보며 고개를 향해 진행한다. 이 길을 따라 옛날 삼척의 소금상(商)들이 태백으로 드나들었다.

◆아홉 남편 섬긴 여인의 전설 서린 구부시령=평지라고는 평상 두어 개 넓이밖에 안 되는 이 공간에 슬픈 전설 하나가 전한다. 이곳에서 행상, 나그네를 상대로 주막을 연 여인이 있었는데 만나는 남자마다 요절해 아홉 남편을 섬겼다고 해서 구부시령(九夫侍嶺)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산이 험하다 보니 다들 실족했다는 설도 있고 나그네들이 주막여인과 잠시 정을 섞고는 산을 내려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덧 오후 6시 무렵. 고개엔 어둠이 짙게 내렸다. 회원들은 랜턴을 꺼내 든다. 본래 일정은 덕항산 정상까지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길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정 대장의 판단에 따라 예수원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어둠에 싸인 하산 길은 더 흐릿하다. 발을 잘못 딛으면 눈은 배꼽까지 빠져든다. 플래시에 의지해 1시간쯤 지나오니 불빛 하나가 반갑게 일행을 맞는다. 성공회 부속건물 예수원이다. 이제야 안도의 숨이 터진다. 눈 속 10시간의 사투, 재킷을 파고들던 추위는 수도원 불빛 한 가닥에 모두 녹아버렸다.

드디어 베이스캠프(버스)로 돌아왔다. 다들 힘들고 피곤하지만 이 힘든 중에도 불을 피우고 하산주를 준비하는 손길들이 있다. 이들의 수고 덕에 일행은 언 몸을 녹이고 마른 목을 축인다. 이원식(경일대) 교수의 스트레칭 지도로 종일 혹사당한 근육들이 제자리를 잡았다.

이번 산행을 통해 일부분이지만 대간꾼들의 산행법을 들여다본 것은 큰 소득이었다. 점과 점을 잇고 선(線)으로만 뻗어가는 이들의 산행법은 일반인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일반 산행보다 강도도 훨씬 셌다. 비용도 만만찮다. 장비를 포함하여 60여 차례 등정 비용은 수백만원을 초과한다. 한 번 시작하면 주말의 반은 산에 꼬박 저당 잡혀야 한다.

경제성과는 거리가 멀고 효율은 기준에도 없다. 어차피 '산밑' 계산법으론 '산위'의 셈법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계산은 눈금이 흐리고 칸(間)이 듬성듬성한 '산 저울'로만 잴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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