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첫 반칙·첫 코너킥·첫 볼넷… 작전 가장한 '사기 게임' 관중은 속을 수밖에

프로스포츠 '독버섯' 승부조작 행태는

한국 프로 스포츠계가 승부조작 파문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프로축구 승부조작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프로배구 선수들이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지난해 관중 600만 명 시대를 열며 국민 스포츠로 우뚝 선 프로야구도 승부조작 의혹에 휩싸이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프로스포츠계에 독버섯처럼 기생하는 승부조작의 실체를 조명했다.

◆축구에서 경정까지 다발적으로 터져

지난해 프로축구계는 승부조작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승부조작에 관련된 47명(선수 40명'선수 출신 브로커 7명)에 대해 K리그 선수자격 영구 박탈 및 직무자격 영구상실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또 자진신고자 25명에 대해서도 K리그 영구 퇴출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최근 프로배구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드러난 것. 특히 프로배구 승부조작 수사 과정에서 프로야구에서도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브로커의 진술이 나오면서 파문은 전 프로스포츠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프로배구 승부조작에 대해서는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승부조작 수사를 맡고 있는 대구지검은 이달 20일 현재 국가대표 출신 등이 포함된 전'현직 남녀 선수 17명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2009~2010 시즌과 2010~2011 시즌에 걸쳐 20여 차례 승부조작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구지검은 프로야구 승부조작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브로커 진술을 통해 용의선상에 오른 선수들이 우선 조사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레저스포츠 종목인 경정도 승부조작 파문에 휩싸였다. 이달 17일 의정부지검은 브로커에게서 돈을 받고 예상 순위를 알려준 혐의로 국민체육진흥공단 소속 경정 선수였던 박모(36) 씨를 구속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주범은 불법 도박사이트

이번 승부조작 파문의 주범으로는 불법 도박사이트가 꼽히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중인 스포츠토토는 승무패를 맞히는 '프로토'와 점수에 베팅하는 '토토'로 이루어져 있어 대규모 선수들이 가담하지 않는 이상 승패와 점수를 조작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불법 도박사이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법 도박사이트에서는 승패뿐 아니라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베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브로커들이 장난칠 여지가 많다.

현재 불법 도박사이트에서 시행되고 있는 베팅방식은 다양하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베팅방식은 승무패방식과 선취점방식이다. 승무패방식은 말 그대로 경기 결과를 예측해 베팅하는 것을 말한다. 선취점방식은 어떤 팀이 선취점을 먼저 올리는지를 맞히는 베팅방식이다.

축구에서는 점수차를 맞히는 점수차방식, 첫 반칙을 저지르는 선수를 두고 베팅을 하는 반칙방식, 어떤 팀이 첫 코너킥을 얻어내느냐를 맞히는 코너킥방식 등의 베팅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구에서는 세트별로 베팅이 이루어지는 것이 대세다. 세트마다 서브득점을 많이 하는 팀에 돈을 거는 서브득점방식을 비롯해 세트마다 어떤 선수가 선취점을 내는지를 맞히는 세트선취점 선수맞히기 등의 베팅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대구지검에 검거된 브로커는 점수 차이가 20점을 넘는지, 미달되는지를 두고 베팅을 하는 '언더오버 20점'으로 도박게임을 개설한 뒤 승부조작에 개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야구는 베팅방식이 천차만별이다. 불법 도박사이트마다 베팅방식이 다를 정도로 베팅방식이 난무하고 있다. 선취볼넷방식(볼넷으로 먼저 출루하는 팀을 맞히는 방식)을 비롯해 ▷선취번트방식 ▷선취안타방식 ▷선취홈런방식 ▷2루타선취방식 ▷3루타선취방식 ▷스트라이크개수방식 ▷삼진개수방식 ▷도루개수방식 등 다양한 베팅방식이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경기 일부분만 조작해도 배당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베팅방식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불법 사이트가 승부조작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불법 도박사이트 브로커들은 승부조작과 경기조작을 모두 시도하고 있다. 대구지검은 프로배구에서는 몇몇 선수들이 브로커와 짜고 지는 플레이를 하는 승부조작을 시도한 반면 프로야구에서는 승부조작보다 경기조작이 시도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프로배구 승부조작 수사 과정에서 한 브로커는 프로야구에서 선취볼넷방식 등을 위해 경기조작이 시도된 것으로 안다는 요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불법 도박사이트는 1천여 개가 성업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축구와 배구, 야구뿐 아니라 농구, 골프, 씨름 등 스포츠 토토와 연관된 종목이라면 예외 없이 불법 도박사이트가 개설되어 있어 방치할 경우 국내 프로 스포츠의 근간을 뒤흔들 위험성마저 안고 있다. 하지만 불법 도박사이트를 대상으로 수사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난해 창원지검은 프로축구 승부조작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도박사이트 서버가 해외에 있어 물증 확보가 어려워 브로커 진술에 의존해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주선책 통해 은밀히 작업

브로커들이 승부조작 또는 경기조작을 위해 선수들을 포섭하는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과거 사례를 통해 그 과정을 유추해 봤다. 지난해 프로축구 승부조작 과정에서는 주선책을 통해 은밀히 작업을 시도하는 방법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선책으로는 선수들과 친분이 있는 은퇴 선수 또는 고참 선수, 동창 등이 동원됐다.

한 프로축구 구단 관계자에 따르면 A선수의 경우 친분이 있는 동창이 찾아와 저녁을 같이 먹은 것이 화근이 됐다. A선수는 돈 잘벌고 잘나간다는 동창으로부터 회식비용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수백만원을 받았다. 당시 A선수는 승부조작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조건 없이 후원금을 주는 동창이 그저 고마웠다는 것. 하지만 세번째 만남에서 동창은 본색을 드러냈다. 전문 브로커와 함께 나타난 동창은 승부조작에 참여하지 않으면 돈 받은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A선수를 협박했다. 약점을 잡힌 A선수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승부조작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프로축구 구단 관계자에 따르면 브로커들은 우선 은퇴했거나 주전 경쟁에서 밀려 그라운드를 밟을 수 없는 고참 선수에게 접근해 주선책으로 포섭을 했다. 주선책이 가장 친한 후배 1명을 끌어들이고 후배 1명이 다시 자신과 친한 동료 1, 2명을 더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승부조작에 필요한 선수를 확보했다는 것. 승부조작을 제시하는 방법도 상황에 따라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골적으로 승부조작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형편이 어려운 선수에게는 주선책을 통해 돈을 주며 도와준 것을 미끼로 승부조작에 가담시킨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격한 스포츠계에서 선배가 간곡하게 부탁을 하면 후배는 거절을 하지 못한다. 승부조작에 개입된 사실을 알고 거의 모든 선수들이 후회를 하며 받은 돈을 돌려 주려고 했다. 하지만 브로커가 돈 받고 승부조작에 참여한 사실을 공개하겠다며 협박을 해 덫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다수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미래는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돈의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변변치 않은 연봉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선수라면 거액을 미끼로 접근하는 브로커의 유혹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근본 원인 제거가 우선

승부조작 사건을 두고 프로축구 구단 관계자들은 승부조작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검찰이 승부조작에 연루된 선수와 브로커에 대한 수사 못지 않게 불법 도박사이트를 뿌리 뽑는 데도 힘을 써야 한다는 것. 한 프로축구 구단 관계자는 "스포츠 정신을 위반한 선수와 브로커를 처벌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 정부가 처벌 강화를 발표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몇몇 선수와 브로커를 처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당장은 승부조작이 잠잠해지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점조직처럼 운영되고 있는 불법 도박사이트를 없애지 않고는 승부조작을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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