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학문을 하루도 폐하지 말 것, 책을 열람할 제 더럽히거나 찢지 말 것, 가벼이 빌려주지 말며 빌려줄 때는 반드시 적어둬 돌려받을 것, 7월 초에 햇볕을 쬐어 좀과 습기를 막을 것, 자손 중 한 권 책이나 한 말 곡이라도 공물을 횡령한 자는 본당 출입을 금한다'(남평 문씨 광거당 전수규약)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책(고서)을 소장한 문중은 어디일까?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 인흥마을에 세거한 남평 문씨가 그 문중이다.
남평 문씨는 '인수문고'(仁壽文庫)라 불리는 특별한 문고를 가지고 있다. 문씨 집안의 문중문고인 셈이다.
현재 남평 문씨 인수문고가 소장한 장서는 8천500여 책에 달한다. 세거지 내 옛 만권당과 수봉정사에 소장돼 있던 6천948책에다 1975년 인수문고가 설립된 이후 추가로 1천500여 책이 수집됐다.
보통 고서의 경우 1책이 2, 3권 분량이다. 8천500책을 권 단위로 환산하면 약2만 권에 달한다.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안동 도산서원의 장서가 약 4천400책이다. 일개 문중인 남평 문씨 집안이 소장한 도서가 영남학파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도산서원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인흥마을은 화원읍 화원교 바로 앞에서 좌회전 후 3㎞를 가다 보면 좌측에 있다.
고려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 온 문익점의 18대손이자 대구 입향조 문세근의 9대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1874)가 61살(1872년)에 집을 짓고 터전으로 삼으면서 남평 문씨 세거지가 출발하게 된다. 14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인 셈이다. 문경호의 후손인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아들들이 분가해 한 동네를 이루면서 아홉 살림집과 두 재실(수봉정사, 광거당)이 들어섰다.
인흥은 원래 고려시대 인흥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가 폐사된 자리다. 당시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물렀던 사찰이기도 하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역대연표'를 여기서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인흥마을로 불렸다.
마을엔 옛 인흥사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웅전 터였던 곳의 문간채에는 고려정(高麗井)이라는 우물이 옛 모습을 우직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 바깥에는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상처투성이로 남은 3층 석탑도 있다.
인흥마을의 남평 문씨가 번성하는 데는 문경호의 손자이자 문영박의 아버지인 후은 문봉성(1854∼1923)대에 이르러 불어난 재산이 뒷받침됐다. 문봉성은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보여 160여만㎡(50만 평)의 토지와 만석꾼에 이르는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다.
어느 날 한 역술인이 문봉성의 관상을 보고 "나라의 큰 재목이 큰 부자에 그치고 마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둘째 아들 영박을 통해 자신의 꿈을 키우게 된다.
아들 영박이 거금을 들여 만 권의 서적을 구입하면서 광거당 내에서 7종의 문헌을 간행하는 데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불서를 간행하던 그 터에서 700년 후에 다시 유서(儒書)를 간행하는 작업이었다.
돈은 아버지가 대고 실제 일은 아들이 다 한 것이다. 만권당을 설치해야 한다는 야심 찬 계획도 아들인 영박이 처음 기안했고 아버지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이루어진 일이다.
인흥의 문씨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수봉정사를 만나게 된다. 영박을 기념하기 위해 사후인 1936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건물 앞채에는 '수봉정사'(壽峰精舍), 뒤채에는 '수백당'(守白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영박의 호(수봉)와 별호(수백당)를 딴 것이다.
수봉정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쪽에 마루를 설치하고 뒤쪽으로는 5칸의 방과 1칸의 누마루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과 관청, 사찰 건물에만 둥근 기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민간 건축물인 수봉정사의 경우 모두 둥근기둥으로 돼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수봉정사는 손님을 맞고 가문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건물로 특히 정원이 아름답다. 앞마당 중앙에 둥글게 흙을 돋워 소나무 고목을 심었고, 담장가로는 화단을 조성했다. 수봉정사로 들어오는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책을 사랑하는 부자 치고 존경받지 않는 부자는 없을 것이다.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서 천하의 좋은 사람을 다 사귀고 싶고, 천하의 좋은 책을 다 보고 싶다."
영박은 책을 좋아해 살림을 털어 고금에 걸쳐 1만 권의 책을 모았고 학자들과 문인들을 좋아했다. 국토를 순례하며 견문을 넓히고 1910년 광거당을 지은 후 큰 서고를 두었다. 바로 '만권당'(萬卷堂)이다. 이곳에서 매일 5, 6명의 유림이 모여 필요한 책 목록을 만들고 하나하나 사들였다.
인흥마을엔 조선 유학자들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수십 명의 선비가 항상 광거당에 묵으며 영박과 더불어 학문과 고금을 논하고 시와 글을 짓고, 술잔을 나누며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만권당 장서 중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책들을 선별해 준 인물은 구한말의 대유학자인 창강 김택영이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양쯔장 하류 난퉁에서 출판사 일을 거들며 나날을 보내면서도 남평 문씨 집안과는 밀접한 교류를 이어갔다.
김택영이 중국에서 구입한 책들을 상해의 배편에 실어 보내면 전남 목포에 도착했다. 배가 왔다는 기별을 받으면 문씨 집안에서는 사람을 목포에 보내 책을 가져와야 했다. 변변한 도로가 없던 시절 수백 권의 책을 운반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포에서 대구까지 책을 운반하는 일은, 서울에서 대구로 운반하는 행로보다 지형적 조건상 몇 배나 더 힘들었다고 한다. 책을 운반하는 수단은 소달구지였다. 수백 권의 책을 실은 소달구지는 목포에서 출발해 지리산 남원으로, 남원에서 다시 함양, 거창, 합천, 고령을 거쳐 달성 화원의 만권당에 도착했다.
당시 열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할 때 소달구지로 짐을 싣고 오는 데 아무리 빨라도 보름에서 스무날은 족히 걸렸다. 만권당의 책은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모아진 것이다. 문씨 일가의 엄청난 돈과 시간, 노력이 곁들여진 결과다.
193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책이 많은 집의 답사기를 연재한 김태준은 인흥 마을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가 나면 수년 전 연희전문학교에 1만여 권 도서를 기증한 전남 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문영박) 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대구역에 내려 화원행 버스를 잡아 탔다. … 화원에서 동으로 한 마장쯤 골짜기로 들어가면 풍치를 갖춘 소나무와 버드나무, 푸른산과 맑은물이 말하지 않아도 처사(處士)의 집같이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 6명 모여 왔다. 장서가 문장지 씨는 벌써 고인이 되고 그 자손들이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돌담과 기와,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 등이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
남평 문씨 일가는 조선의 문풍(文風)을 지키면서 장서가 많은 집으로 전국적으로 소문 나 있었다.
영박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 별세할 때까지 13년 동안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줘 독립운동을 크게 진작시켰다. 1930년 12월 그가 별세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1년 이교재를 국내에 밀파해 그를 애도하는 조문을 보냈다. 그의 자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가 독립하지 못한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동양평화와 유신을 크게 내세워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고인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줘 무궁한 국가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경상도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이교재는 일경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자택 천장에 감추어 두었는데, 광복 후 발견돼 그의 후손에게 전달됐다. 정부는 영박에게 지난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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