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38] 아동문학가 권영세의 고령 성산

아흔셋 어머니가 지키는 곳, 상상 타임머신 타면 대숲 바람소리가…

내 고향은 고령군 성산면 기산리 속칭 지경마을. 형님과 함께 고향집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생각에 날마다 산소가 있는 앞산을 바라보신다. 갈수록 시력이 떨어져 요즘은 망원경으로 산소를 살펴 보신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 고향은 고령군 성산면 기산리 속칭 지경마을. 형님과 함께 고향집을 지키고 계신 어머니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생각에 날마다 산소가 있는 앞산을 바라보신다. 갈수록 시력이 떨어져 요즘은 망원경으로 산소를 살펴 보신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1969년 첫 교사 발령지인 성산초교. 당시 느티나무가 아직도 운동장을 지키고 있다. 첫날 출석을 부르자 한마을에 살던 아이가
1969년 첫 교사 발령지인 성산초교. 당시 느티나무가 아직도 운동장을 지키고 있다. 첫날 출석을 부르자 한마을에 살던 아이가 "뭐"라고 대답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고령 금산재 아래 산림녹화 기념 숲에 들어선 필자의
고령 금산재 아래 산림녹화 기념 숲에 들어선 필자의 '이 숲에서 함께 뛰놀자' 시비.
권영세 아동문학가
권영세 아동문학가

나의 고향 고령 성산은 낙동강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은 88고속도로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고, 동고령IC가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인심 좋은 고장이다. 17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는 성산에는 당도와 빛깔 좋기로 이름난 '성산멜론'의 주산지로 전국적인 판매망이 형성되어 농가의 소득 증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달성군 위천삼거리를 지나면 해인사 방향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고령교를 만난다. 건너편에는 강 뒤로 우뚝 솟은 산등성이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에 봉화를 올렸다는 강정리 봉화산으로 짙푸른 강물에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다리 아래 펼쳐진 모래벌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자주 소풍 가던 곳이다. 가끔 지나가는 길에 다리에서 내려다보면 개구쟁이들이 모래밭에서 뜀박질을 하고 뒤엉켜 씨름하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지금은 이곳에도 4대강 정비공사로 강변의 모래벌은 사라지고 둔치에는 산책로가 깨끗이 조성되었지만 정겹던 그 옛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강을 건너 조금 더 가면 5일장이 서는 득성리다. 내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이곳에서 사진관을 했다. 젊은 시절 면서기를 하다 그만두고 사진관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뚜렷하다. 그때는 대개 신부집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마을로 다니면서 찍은 결혼사진을 현상하는 일은 집에 있는 암실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아버지 곁에 앉아 현상약 가루를 물에 녹이기 위해 팔이 아프도록 링거병을 흔들어야만 했다. 그때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배운 사진 기술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사진반장을 하기도 했다. 읍내에서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카메라를 메고 나가 찍은 사진을 학교 암실에서 현상하곤 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지만 한동안은 아버지처럼 멋있는 일류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대구시내의 유명한 사진관을 기웃대곤 했던, 그냥 웃어넘기지 못할 추억도 있다.

득성리를 벗어나면 성산면 소재지가 있는 어곡리다. 이곳은 교직자로서 나의 꿈이 시작되었던 20대 청년교사 시절이 있었던 곳이다. 약관의 나이에 초등교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나의 모교인 성산초등학교가 있다. 만 스무 살이던 1969년 3월에 교사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4학년 담임을 맡았다. 첫날 출석을 부르는데 한 마을에 살던 아이가 '예'하는 대답 대신 '뭐'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교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 친척 동생이던 그 아이는 평소 한마을에서 지내면서 나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버릇 때문에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크게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로 출근할 때면 한마을에서 등교하는 아이들과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어가곤 했다. 6년 동안 그 학교에서 근무하고, 지금은 폐교가 되어 도요원을 하고 있는 인근 학교로 이동하였다. 그 학교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있었는데, 근처에 무덤이 많았다. 혼자서 숙직을 하는 겨울밤이면 소변을 보러 밖에 나가지를 못해 애를 먹었던 일이 새삼 머리에 떠오른다. 고향에서의 교직생활 8년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은 행정리로는 기산리이며, 자연부락명으로는 지경(地境)이다. 또한 속명으로는 진골이라고도 한다. 산이 마을을 포옥 둘러싸고 있어 마치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은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의 마을이다. 마을 입구는 88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요즘처럼 한적한 마을 사람들에게는 수시로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들을 눈요기 삼을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를 일이다. 마을의 가구 수는 예나 지금이나 스무 집 안팎이다. 이곳에서도 지금은 변호사를 하고 있는 부장판사가 태어나고, 중소기업가가 태어나고, 나 같은 공직자도 몇 명 태어났으니 결코 작은 마을은 아닌 듯싶다.

내가 어릴 적 어른들은 이제 하나 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그 자녀들은 객지에 나가 있으니 빈집도 몇 채인가 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다 보면 또래 어른들이 모여 앉아 소일하던 평상이 하나 놓여 있다. 언젠가 고향집에 들르러 가다 보니 흙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왼쪽의 언덕바지에는 마을 회관 겸 경로당 건물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날따라 거기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고향집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그곳에서 마을 안노인들과 어울려 동전 몇 닢씩 걸고 윷을 놀거나 화투를 치다가 해거름이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곳이라 눈길이 쉬 끊어지지 않는다. 지난해 늦가을, 어머니께서는 이제 다리의 힘이 없어 거기까지 가려면 몇 번이나 쉬어야 한다고 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연세가 들어가는 당신을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나의 고향 마을도 지금은 여느 곳과 다름없이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직장 따라 객지로 나가고 마을에는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어릴 적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몰려다니는 아이들 소리로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는데, 이제는 고향 마을이 온종일 적막하기만 하다. 마을 가까이 내려온 산기슭에는 지난가을 하얀 꽃을 피웠던 억새가 이제는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 있다. 마치 자식을 기다리는 고향집 어머니들처럼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언젠가 시골 논두렁에 하얗게 피어 있던 억새꽃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가 있다. 이 시는 지난가을 부산의 지하철역에 게시되기도 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으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들길까지 내려와서/ 손짓하실까?// 가을 볕살에/ 까매진 얼굴// 하얀 머릿수건 쓰고// 논두렁에 올라서서/ 한길 쪽 건너보시는/ 우리 어머니.'(권영세 시 '억새풀' 전문)

지금 나의 고향집에는 금년 연세가 아흔 셋이신 어머니가 당신을 수발들기 위해 온 맏형과 함께 계신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을 월배의 중형(仲兄)집에서 보내다 시골로 돌아오셨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어머니 당신도 한평생 살던 시골집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차츰 사라져가는 기억을 머리에 떠올리며 매일 같이 집에 데려달라는 간절한 그 마음을 자식들이 어찌 외면하랴. 어머니와 함께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아버님의 산소가 있는 앞산등성이를 바라본다. 순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아버님이 벌떡 일어나 뭐라고 소리칠 것만 같은 그리움이 왈칵 밀려온다.

고향집 뒤에는 왕대밭이 있어 내가 어릴 적에는 이곳이 우리 집 소득원(所得源)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플라스틱 제품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라 대나무로 소쿠리나 다른 용기(容器)를 만드는 사람들이 대나무를 사갔다. 그리고 참외나 딸기 등 특수작물을 하는 사람들도 비닐하우스를 만들기 위해 사가기도 했다. 왕대나무가 차례로 팔려나가면서 우리 어린 형제들에게는 아쉬움이 컸었다. 굵은 왕대줄기에 새끼줄을 매고 그네를 탔던 놀이기구가 차츰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우리 집의 몸채는 전형적인 오두막집이었다. 나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토굴 속 같은 방안의 호롱불 밑에서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내 차례가 되면 언제나 내가 갓난아기 적부터 시작한 잦은 병치레로 고생한 일들이며, 할머니 등에 업혀 피란길을 가다가 포탄의 파편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들을 몇 번이나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주곤 했다. 그럴 때면 나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그때의 어머니를 간절히 생각하곤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변동(무태)에서 고향집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인데도 발길이 자주 옮겨지지 않는다. 이제 그곳은 어릴 적 나의 꿈과 동경의 세계는 없고, 너무나 많이 변해 버린 삭막한 현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상상의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날의 고향집 대숲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난다.

'고향집 대숲에는/ 바람이 살을 맞대고 산다.// 아침, 저녁/ 사각사각 댓잎들/ 살갗 비비대는 소리/ 대숲 맴돌다 사그라지고,// 가끔 세찬 바람이/ 우수수수 댓가지 흔들다/ 작은 바람 몇 자락 남기고 떠난/ 고향집 대숲// 저녁 비둘기/ 보금자리 찾아드는 대숲에는/ 올망졸망 어릴 적 형제들/ 남긴 이야기들이/ 바람 소리에 섞여/ 도란도란 들려온다.'(시 '고향집 대숲에는' 전문)

권영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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