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자(58·여) 씨는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남편은 딸 이름을 "네 꿈을 세상에 마음껏 펼쳐라"는 의미로'나래'라고 지었다. 큰 딸이 살아 있다면 올해 나이로 서른이다. 하지만 나래는 꿈을 채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여섯 살때였다. 자식을 잃은 상처에 더 해 9년전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박 씨가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인생의 짐이 너무 무겁다.
◆자식을 가슴에 묻다
3일 오후 대구의 한 대학병원 11층. 박 씨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 김상호(58·뇌병변 장애 1급) 씨를 일으키고, 기저귀를 갈고, 얼굴을 닦았다. 듬직했던 남편은 이제 아내의 도움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됐다.
박 씨도 한때 행복한 삶을 살았다. 특수학교 교사였던 남편과 귀여운 딸 세 식구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하지만 불행은 소리없이 찾아왔다. 1989년 3월 오후였다. 나래가 유치원에 갔다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래 엄마, 큰일 났어! 어서 밖으로 나가봐!" 아파트 주민이 소리를 지르며 박 씨를 찾았다. 항상 활짝 웃으며 엄마를 반기던 딸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교통사고였다.
박 씨는"친척들이 화장하라고 했지만 흔적이 있어야 그리움을 삭일 수 있을 것 같아 경북 성주의 산에 묻었다. 목격자들은 '유치원 차량이 후진하다 아이를 치었다'고 했지만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어 사고 원인도 모른채 딸을 보냈다"고 말했다.
◆남편이 쓰러지다
딸의 장례식에서 박 씨는 남편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그해 봄 김 씨는 학교에 40일간 병가를 내고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남편은 힘겹게 일상으로 돌아갔고 박 씨가 1995년 둘째 아들 나엘이(18)를 낳으면서 상처는 아무는 듯 했다.
하지만 2004년 이들 부부에게 큰 고비가 또 닥쳤다. 김 씨의 동료 교사는 남편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친척이 괜찬은 사업을 하는데 연대보증을 서 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그에게 재직증명서를 달라고 했다.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하는 사이인 탓에 어쩔 수 없이 보증을 서줬고 결국 그 일이 화살이 돼 돌아왔다. 보증을 선 업체가 부도나면서 아파트는 물론 김 씨 월급까지 압류됐다. 부부는 집을 잃고 달서구 상인동의 지하 달셋방으로 옮겼다.
그래도 부부는 몸만 건강하면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큰 딸을 잃은 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던 김 씨는 집까지 잃자 결국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뇌경색이라고 했다. "원래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한번 쓰러지더니 자꾸 발작을 일으켰어요. 대학병원에 가니까 뇌수술을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해 5월 김 씨는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대학병원에 갔다. 건강을 되찾을 줄 알았지만 김 씨는 전신이 마비된 채 수술실에서 나왔다. "곧 일어날 거라는 생각으로 3년을 병원에서 버텼어요. 수술비와 입원비, 병원비만 수천만원이 나와 시댁이 집까지 팔았어요."
박 씨는 매년 봄 남편의 구두를 깨끗이 닦는다. 언젠가는 남편이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어서다.
◆이길 수 없는 싸움
불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박 씨는 병원을 떠나기로 했다. 그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수술 당시 의료진은 "왼쪽 뇌를 수술한다"고 설명했지만 진료기록부에는 오른쪽 뇌를 수술한 것으로 돼 있었다.
진료기록부를 들고 다른병원 의사들에게 자문을 받았더니 '의료사고'라고 했다.
이때부터 힘든 싸움이 시작됐다. 박 씨는 친척에게 돈을 빌려 변호사를 선임하고 병원을 상대로 대구고등법원에 의료과실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다.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고 대법원까지 갔지만 결국 이기지 못했다.
소송 뒤 부부의 삶은 더 초라해졌다. 병원에서 나오자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2006년 영구임대아파트 입주 자격을 얻었고 지금은 병원과 아파트를 오가며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
박 씨는 올해 고3인 나엘이가 걱정이다. 집에 혼자 남겨진 아들은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간다. 아파트 관리비가 밀려 얼마 전 물 공급이 끊겼다.
"돈 때문에 학원도 못 보내고 항상 미안했는데 수도까지 끊겼네요. 면목이 없어요."
나엘이는 불평 한 번 내뱉지 않고 있다. 수시로 병원에 찾아와 엄마를 밀어내고 아빠 병간호를 하며 쪽잠을 잔 뒤 학교에 간다. 나엘이의 꿈은 목사다. 세상에는 자기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희망을 잃지 않으면 그들도 삶의 희망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아들 때문에 박 씨도 삶을 이어간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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