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당의정 대선'을 경계하라

워런 하딩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지만, 재임 중에는 이미지가 괜찮았고 인기도 있었다. 잘생긴 외모로 여성들이 좋아했던 그는 1920년대 초에 61%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기업 중심의 산업 장려 정책을 펴면서 무난하게 국정을 수행하던 그는 재임 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 잘못된 국정 운영의 실체가 속속 드러났다. 하딩이 자신의 포커 친구나 정치 장사꾼을 요직에 등용, 부패로 얼룩지게 하였던 것이다. 하딩은 결국 리더십과 통찰력이 모자랐으며 역량도 달렸던 인물, 대통령이 되지 말았어야 할 대통령으로 오점을 남겼다.

이처럼 지도자의 이미지와 능력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에 힘입어 권좌에 올랐지만,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다. 예상치 못하게 닥친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를 극복하고 일정한 성장세를 이어오지 않았느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겠으나 빈부의 심각한 양극화와 극도로 떨어지는 체감경기 앞에서는 설득력을 잃는다. 게다가 이 대통령은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 등 민주적 가치를 훼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고 측근 비리가 줄줄이 터지면서 인사 관리 실패와 도덕성의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애초에 비쳤던 이미지와 어긋나는 길을 갔고 국민이 기대했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차기 대통령을 향한 레이스에서 대선 주자들의 이미지 메이킹이 시작돼 국민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은 다른 주자들에 비해 이미지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며 상당히 복합적이다.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 '개인적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지도자'라는 좋은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얼음 공주'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 '소통에 인색하고 독재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와 후광 효과로 좋은 평가를 얻기도 하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정수장학재단 문제는 부담스런 짐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신중하고 차분하며 진보적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노 전 대통령과는 다른 이미지를 쌓는 것이 과제이며 최근 '이해찬+박지원 담합' 논란에서 점수가 깎이기도 했다. 김두관 경상남도지사 역시 '작은 노무현'의 이미지가 안기는 강점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고민일 것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인기를 얻는 것은 벤처 기업가로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진지하고 도덕적이며 따뜻하다는 이미지가 작용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손학규 민주통합당 전 대표 등은 자신만의 뚜렷한 이미지를 아직은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좋은 이미지를 많이 내세우려 하겠지만, 이미지에 치중해 지도자를 뽑는 것은 위험하다. 대선 후보들의 자질과 걸어온 길, 공약과 실천 진정성 등이 앞으로 검증대 위에 오를 것이고 이를 제대로 거르는 작업은 그래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당의정의 달콤한 겉 맛뿐만 아니라 속 성분까지 세심하게 점검한 후 약을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면에서 지난 4'11 총선은 '당의정 선거'의 폐해가 드러났다. 여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주도로 당명 개정과 쇄신 작업을 벌였으나 일부 당선자들의 성추행과 논문 표절 의혹으로 진정한 쇄신인지 의문을 갖게 했고 야당도 연대를 내세워 정권 심판을 외쳤지만, 미래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올 연말 대선도 이런 점을 경계해 대선 주자들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박근혜 의원이 5년 전 '줄'푸'세'를 외치다 복지 확대를 강조하는 것이 시대 변화에 따른 정치 철학의 변화인지 그 진정성을 확실하게 따져봐야 한다. 문재인 고문과 안철수 원장, 다른 후보들이 제시하는 국가상이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맞는 것인지 현미경을 들이대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언론의 검증과 함께 유권자의 몫이다. 훌륭한 스포츠 경기가 관중으로 꽉 찬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가진 기량을 모두 쏟아낼 때 가능하듯이 좋은 선거는 많은 유권자가 참여해 후보들의 자질을 잘 검증하고 최대한 높은 투표율로 당선자를 뽑는 것이다. 올 연말 대선이 '당의정 선거'에서 벗어나 가치 있는 선거가 되는 것은 여기에 달렸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