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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의 시와 함께] 암전/김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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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가요 이제

그래요 이 어둠 속에서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더 이상 결전의 각오 따윈 없어요

기대할 것이 없어 어깨가 저문 엄마도

이미 시든 정물(靜物)인 걸요

빠져나갈 수 없으니 그냥 빠져 있을래요

어둠이 걷힐 때 나가 어둠을 맞받아치며 돌아오지만

그 사이도 그저 막간(幕間)일 뿐이죠

투명한 유리컵에 몸을 반쯤 담군 고구마처럼

푸른 순은 점점 시들어 말라가고

오래된 갈등이 썩어가듯 속은 비어가고

그 속절없는 생을 떠받치느라

하얗게 쉬어버린 뿌리처럼 늙어지겠지요

하지만 덫이 아니라 유산이라 해두지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지 알 나이니까요

가끔 마음이 쓰릴 때도 있지만 슬픔은 없어요

이쪽과 그쪽의 바람이 머무는 이곳이 좋아요

내란 같은 삶이 잠시 멈춘 시간, 그 너머가 궁금해도

더는 생의 호객꾼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부디 잊어주세요

그러다 보면 그렇게 살아지다 보면

어느 날은 모두 잊혀지고 또 무엇인가 되어 있겠지요 아버지

낮은 목소리로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김명기 시인의 작품입니다. 암전(暗轉)이란 연극에서 막을 내리지 않은 채 무대의 조명을 끄고 장면을 바꾸는 일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이것을 '내란 같은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삼고 있네요.

어둠 속이기 때문일까요. 암전 속에서 바라보는 삶은 그리 밝지 않네요. 그래서 어떤 확신도 없이 생을 소비시키는 '생의 호객꾼'이 되기 싫다고 한 것이겠지요. 이 지치고 무기력한 삶이 어쩌면 우리의 참모습이 아닐까요.

그래도 무대가 밝아지면 싱싱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암전의 시간도 '덫'이 아니라 남은 이가 삶을 위해 처분할 '유산'일 테니까요.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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