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파평인 윤장과 합천 묵와고가의 모과나무

벼슬 버리고 은거할 때 심어…훤칠한 키 눈길

우리 일행은 잘 생긴 소나무(천연기념물 제289호) 한 그루를 보기 위해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로 향했다.

해인사 나들목을 빠져 나와 야로를 거처 묘산면사무소로 가는 도로변에 소나무와 묵와고가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다. 조금 진입하니 길이 두 갈래였다. 이미 이곳을 와 본 예근수 씨가 바로 가면 소나무가 있는 곳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묵와고가가 있다고 했다. 일단 처음 목표로 삼았던 소나무를 먼저 보고 내려오는 길에 고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소나무는 찻길이 끝나는 곳 오른 쪽 아래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 수령 400여 년, 수고(樹高) 17.5m로 좋은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명품소나무가 틀림없다.

내려오는 길에 묵와고가를 찾았다가 또다시 놀랐다. 이런 깊은 골짜기에 큰 규모의 고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안주인 황정아 씨였다. 자신은 경북여고 출신이라며 대구에서 왔다고 하니 더 반갑다고 했다.

묵와고가(默窩古家, 중요민속문화재 제206호)는 선조 때 선전관을 역임한 윤사성(尹思晟)이 지었으며 원래는 대지 600평에 100여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거듭 퇴락하여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더 이상 비워둘 수 없어 황 씨 내외가 도시생활을 접고 귀향했는데 좀 더 일찍 돌아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안채(중요민속문화재 206-1호)를 거쳐 후원에 이르니 거대한 모과나무가 우리를 압도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뺏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화를 입은 김종서의 사촌 처남이었던 입향조 윤장(尹將)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할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줄기가 일부 썩었으나 아직도 강건하고 수고(樹高)도 20여m로 자주 목격되는 키가 낮은 다른 모과나무와 달랐다.

품새나 수령으로 볼 때 천연기념물로도 손색없을 것으로 보이나 보호수에 그쳤다. 누마루가 아름다운 사랑채(중요민속문화재 제206-2호)에서 황 씨로부터 집안 내력을 잠시 들었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굴뚝이 낮고 어떤 것은 축대에 구멍을 뚫어 굴뚝을 대용했는데 이는 밥 짓는 연기가 멀리 나가는 것을 막아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묵와 윤우(1784~1836)대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았던 것 같다. 아버지 윤경목과 어머니 합천 이씨 사이에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해 거창에 거주하던 같은 윤문의 이름 높은 선비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로부터 글을 배웠다. 스승인 현와는 "장차 이 아이 때문에 내 이름은 필시 가려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1816년(순조 16) 공의 나이 33세 때 아버지 참의공이 돌아가시니 예법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비를 세웠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동향의 묵산 문해구(文海龜, 1776~1849)와 더불어 이연서원(伊淵書院)에서 향리의 청년들을 모아 강론을 펼쳐 합천의 문풍 진작(振作)에 힘썼다.

어머님의 간청으로 과거에 응시해 마침내 성균관 진사에 뽑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재상(宰相)이 찾아와 승진을 도와주겠으니 뇌물을 바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며 분수대로 살겠다고 했다 한다.

그해 순조 임금이 돌아가니 슬픈 마음을 '문대행대왕승하통곡유감(聞大行大王昇遐痛哭有感)'이라는 시로 남겼는데 원문이 '파산세고'(坡山世稿)에 전해온다. 1836년(헌종 2년) 유명을 달리하시니 향년 53세, 지천명을 불과 3년 넘긴 나이였다. 부인 해주 정씨와의 사이에 6형제를 두었다. '공은 덕성이 깊고 뜻이 높고 밝았으며 정정당당한 식견과 엄밀하게 지키는 법도는 실로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전한다.

공의 후손 중 근세에 두드러진 인물은 만송(晩松) 윤중수(尹中洙, 1891~1931)다. 만송은 3'1독립만세운동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에 동참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천석의 재산을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내 놓는 등 조국해방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 무순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 병으로 영면하니 41세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