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31)김천 선비의 표상 梅溪 曺偉(하)

조위에 상사병 궁녀 애절한 심야 구애 몰래 보던 성종은…

매계 조위를 모신 율수재에 들어서면 연못과 아치형 다리가 조화롭게 놓여 있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건물 앞 배롱나무에는 붉은색 꽃이 만개해 찾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매계 조위를 모신 율수재에 들어서면 연못과 아치형 다리가 조화롭게 놓여 있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건물 앞 배롱나무에는 붉은색 꽃이 만개해 찾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조위가 두보의 시를 한글로 해석한
조위가 두보의 시를 한글로 해석한 '분류두공부시언해'.
율수재 길 입구에 있는 매계 선생 생가임을 알리는 유허비.
율수재 길 입구에 있는 매계 선생 생가임을 알리는 유허비.
매년 5월 말이면 매계 조위 선생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한 매계백일장이 율수재에서 열린다.
매년 5월 말이면 매계 조위 선생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한 매계백일장이 율수재에서 열린다.

얼마 전 TV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인기를 끌었다.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서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 손자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는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에 대한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실존 가능성이 낮은 인물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식적으로 기록된 정사도 있지만 민간에서 주로 쓰인 야사도 있다. 때론 야사가 정사보다 더욱 많이 회자되고 대접받는 경우도 많다. 김천 선비의 표상인 매계 조위(梅溪 曺偉)를 둘러싼 야사도 전하고 있다.

때는 조선 성종조. 당시 나라는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기다.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겼고, 임금도 신하를 지극히 사랑했다. 김천 선비인 매계 조위는 한림학사로 있었다. 시문에 뛰어난 그는 신숙주의 손자인 삼괴당 신종호(三魁堂 申從濩'1456∼1497)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친한 만큼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학문을 논할 때는 젊은 혈기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종 10년, 어느 추운 겨울밤. 눈이 내려 궁궐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잠을 뒤척이던 왕은 뜰에 나와 흰 눈 위에 비치는 달빛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궁녀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바삐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심한 밤에 달빛을 받고 걷는 궁녀 모습에 왕은 호기심에 이끌려 그녀 뒤를 밟는다. 여인의 발걸음이 학사들이 공부하는 경연이라 더욱 왕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이때 라이벌 관계인 매계와 삼괴당은 서로 옆방을 쓰고 있었다. 궁녀는 한림학사 조위의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지 않는가? "매계는 학문이 높아 총애하고 있었는데 궁녀와 놀아나다니… 더구나 경연으로 궁녀를 끌어들인 인물일 줄이야…." 왕은 조위에 대한 실망감을 지나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대궐 안에서 학사가 젊은 나인과 사랑놀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풍류를 아는 성종은 방금 괘씸하게 생각한 것을 잊고 임금의 체면조차 버리고 조위의 방을 엿보기 시작했다. 선남선녀가 벌이는 사랑놀이를 엿본다는 자체가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궁녀의 사랑 고백에 넘어간 선비 조위

그러나 문틈으로 들여다본 광경은 전연 딴판이다. 사랑놀음은커녕 책상을 두고 뒤로 돌아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는 조 학사에게 궁녀가 선 채로 애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광경이라니….

"조 학사께서 입궐하시던 날 먼발치에서 뵈온 후 남몰래 사모해 온 정을 주체하지 못해 죽기를 각오하고 오늘 밤 찾았는데 이리도 냉정하십니까?" 조 학사는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얼른 나가 주시오. 이곳이 어느 곳인 줄 알고 이러는 게요" 하고 타일렀다. "상사의 병이 깊어 마지막 소녀의 간절한 심정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장소를 가릴 수가 없나이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은 어느새 애달파 하는 궁녀의 편으로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고지식하기는… 저러다 궁녀 하나가 꽃다운 나이에 가고 말겠구먼, 사람의 목숨 앞에 도학이 무엇이며 도덕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부터 살리게…) 왕은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하는 걸 꾹 참고 지켜보았다. 옆방의 신 학사도 이런 소란을 눈치 채고 있을 텐데 나중 일이 걱정되기도 했다.

방 안에서는 "나는 황공하옵게도 상감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이요. 상감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밖에 없으니 어서 물러가시오." "서방님 충성스런 마음도 기특하지만 임을 향한 이 하잘것없는 붉은 마음도 헤아려 주소서"라며 애틋한 얘기가 이어졌다.

왕은 내심 흐뭇했다. 학사 조위의 자신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고 기뻤다. 그런데 갑자기 궁녀가 "소녀의 사랑을 끝내 거절하시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라며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한다. 당황한 조위가 칼을 뺏으려고 엎치락뒤치락 결국 궁녀와 함께 나뒹굴고 만다. 그 바람에 호롱불도 꺼지고… 방안은 깜깜하고 옷깃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이내 조용해지고 그 후 방에는 불이 다시 밝혀지지 않았다. 성종은 용안 가득 웃음을 머금고 옆방의 동정을 살피는데 학사 신종호의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자 침전을 향한다. 삼경을 넘어 왕은 손수 자기가 덮는 이불을 추운 방에서 꼭 껴안고 잠든 조 학사와 나인을 덮어주고 몰래 경연을 빠져나왔다.

이튿날 눈을 뜬 조 학사는 용포를 덮고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비백산. 왕의 침전에 달려가 꿇어 엎드렸다. 바로 그때 신 학사도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로 노기등등해 왕을 알현한다. 왕은 용안에 웃음을 띤 채 "신종호는 어명을 받들라"고 한다. 신 학사가 간밤 조위의 난행을 탄핵하려는 의중을 읽고 왕이 이를 가로막고 나선 것. "한림학사 신종호는 평안도 안찰사를 명하니 지체 말고 어명을 받들고 떠나라"고 왕은 말한다. 신 학사가 떠난 후 조위는 "전하, 소신을 죽여 주소서…"라고 말을 잇지 못한다. 왕은 "간밤 일은 신 학사가 돌아온 뒤 논하라"며 물러가게 한다.

◆평양 간 신 학사도 기생 매향과 정을 나누고

한편 벼락감투를 쓰고 평양에 다다른 신 학사는 따라간 비장이 마련한 초가집에서 하루 머물게 된다. 저녁상을 물리고 피곤한 몸을 누이려 하는데 주인 아낙이 작은 술상을 봐서 수줍은 듯 들어온다. 술상 위에는 몇 접시의 안주가 맛깔스럽게 놓여 있었다. 술맛 또한 기가 막혔다. 귀한 매화주다. 아낙은 소복을 입었는데 자태가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술 몇 잔에 취기가 더하자 그는 "소복은 무슨 연고인가?"라고 묻는다. "남편 상을 당해 내일이면 복을 벗게 됩니다. 귀하신 분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리는 술잔이오니 크게 탓하지 마소서"라며 얼굴을 붉혔다. "내일이 대상이라… 그럼 상복을 벗고 난 후 나를 따라 서울로 가지 않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여인은 양미간을 찡그리는 듯하더니 "거두어 주신다면 …"이라며 들릴 듯 말 듯 말한다. 급한 마음에 그는 그날 밤 정분을 맺으려 했으나 "글피면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게 되는데 이틀만 참아 주시지요"라는 말에 군자로서 도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사흘째, 참고 자제한 만큼 두 남녀는 뜨거웠다. 임금의 명도 잊을 만큼 며칠간 단꿈에 빠져 지낸 신 안찰사가 정신을 수습하자 벌써 돌아갈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다. "사실 이번 길은 임금님의 명을 받고 온 길이요. 서울 가서 사람을 보낼 테니 올라오겠소." "군자의 말씀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하오나 신표(信標)라도…" "신표?… 무슨 신표를 남겨 줄꼬?" "이 치마에 일필이라도 남겨 주시면…" 하고 비단 치마를 펼쳐 놓는다. 신 안찰사는 웃으면서 호기롭게 '세죽청매연수애 동풍춘의만향각((細竹淸梅緣水涯 東風春意滿香閨)'곧은 대나무와 맑은 매화가 물가에 물 흐르듯 연을 닿아, 동풍에 실려 온 향기가 새댁 방에 가득하여 봄뜻을 알겠구나'라는 조부 신숙주 화첩의 시구를 묵향 가득히 묻혀 써 주었다.

◆병풍에서 매향이 짙은 까닭은

그 후 신 안찰사는 어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성종은 안찰사 임무를 마친 신종호를 격려하기 위한 주연을 마련한다. 이 자리에 조위도 불렀다. 어주가 몇 순배 돌아도 두 신하는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분위기가 냉랭하다. 이에 임금이 신 학사를 보며 "평양 기생이 유명한데 기방 출입을 해 보았는가"라고 은근하게 묻는다. 화들짝 놀란 그는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춘색에 빠져 지엄하신 명을 잠시 잊은 죄 크옵나이다"라며 그간의 사정을 아뢰었다. 박장대소한 성종은 "경은 과연 곧은 선비로다. 그런데 병풍 뒤에서 매화 향기 가득하니 무슨 연유인가?"라며 "왼쪽 병풍 자락을 걷어보고 이유를 말하라"고 채근한다. 신종호가 조심스레 나아가 병풍을 걷으니 그곳엔 평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던 과수댁이 있지 않은가. 왕이 친히 오른쪽 병풍을 걷으니 그곳에는 궁녀 비연이 다소곳이 서 있다. 두 신하는 황공하기 그지없었다. 신 학사가 좋아했던 여인은 청상과부가 아니라 평양에선 이름 높은 기생 매향(梅香)으로 성종이 그가 조위를 탄핵하지 못하도록 평양 감사에게 명을 내려 몰래 꾸민 일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어진 임금의 기지로 신하의 충성심은 절로 우러나고

임금은 두 신하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손을 맞잡게 한 후 "두 사람은 과인이 믿는 신하다. 서로 불목하면 짐의 마음이 편치 않으니 마음을 합하여 이 나라를 밝은 정치로 이끌어 달라"고 했다. 두 신하는 그저 감읍할 따름이다. 이후 둘은 형제와 같이 친함을 나누었다.

풍류를 아는 임금이 기지를 발휘해 충성스런 신하의 반목을 해소하고 동량(棟樑)으로 키워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도록 했다. 여름날 매계 조위를 모신 율수재에는 붉은색 백일홍이 곱게 피었다. 매계를 둘러싼 야사는 선생의 고귀한 성품과 풍류를 아는 조선 선비의 멋을 느끼게 한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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