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는 어떤 특정 시대를 풍미한 감정 상태와 사고 경향을 말하며, 우리말로는 '시대정신'으로 번역된다. 대권을 놓고 다투는 민주사회의 대통령 선거는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올 연말 대선을 향해 출사표를 던진 유력 후보 대부분은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가진 자의 정당' '부자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가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삼았다는 점이다. 한때 진보'좌파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경제민주화가 보편적 가치이자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시대정신을 외면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경제민주화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푸념식 반발에서부터 '허울 좋은 경제민주화는 주자학의 부활일 뿐'이라는 일부 언론의 주장까지 스펙트럼도 다채롭다. 재벌 관련 연구소는 '경제민주화보다는 일자리가 중요하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경제민주화를 폄하시키려 한다. 국민들은 말 안 해도 다 아는 소리를 굳이 "나는 잘 모르겠다"고 외면하는 이들은 모두가 재벌공화국의 추종자들이다. '황제'가 직접 나설 필요조차 없다. '공화국'에 '황제'라니? 바로 이 점이 '재벌공화국' 대한민국의 '웃기는 현실'이다.
이쯤에서 재벌공화국의 형성 과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의 험난한 과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경제와 민주화 양 측면에서 눈부시게 발전해온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시절 재벌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산업화를 성공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수는 있겠지만, 재벌의 뒤에는 '권력의 특혜'가 있었다. 다만, 산업화 시절 재벌에게 권력은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데 이후 정치민주화 과정에서 공적권력이 분산되고 약화되면서 정치권력 중심의 '서울공화국'은 시장권력 중심의 '재벌공화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론 선도층에 대한 로비와 국가 정책 기능이 시장권력에 의해 포획되면서 '시장 만능주의' '규제 완화 지상주의' '신자유주의 체제의 고착화'가 완성됐다. 삼성의 공정거래위원회 업무 방해는 재벌이 국가권력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이제 재벌의 활동과 영향력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 이윤 추구라는 영역을 넘어 정치와 여론 형성을 포함한 공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됐다. 정당과 정치인은 정치자금 지원으로 입을 막고, 언론은 광고로 손발을 묶거나, 아니면 직접 언론사를 운영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정부 공무원과 학계, 법조계도 각종 로비와 자문 용역 등으로 수족으로 부리는 형국이다. 오죽하면, 출마 선언조차 하지 않고도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강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른 안철수 서울대 교수조차 '거액을 횡령한 재벌 총수(황제)를 위해 구명운동'에 나서고, 재벌의 금융업 진출에 동참하려 했을까. 그리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비단 안철수 교수뿐일까. 겉으로는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경제민주화를 말하며, 뒤에서는 재벌의 이익과 자신의 사익을 부합시키기 위해 애쓰는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넘쳐난다는 것이 현실적 판단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 논쟁은 탁상공론'이라는 재벌 추종자의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아직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왕쥐'를 보지 못한 탓이다. 국민들이 '행동'이 아니라, 정치인의 '말'과 '그럴싸한 이야기로 포장된 책'만 보고 환상에 빠질 때, 재벌의 입꼬리는 올라가게 된다. 흑색선전에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여야 대선 후보들에 대한 가혹하리만큼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인 미국은 독점의 경제적 비효율성을 간파하고 1890년 셔먼법을 제정했고, 1914년에는 클레이튼법으로 연방정부가 기업 분할과 매각 명령권을 확보했다.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아메리칸 타바코, 뒤퐁, 벨 등이 이렇게 해서 해체되거나 분할됐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재벌공화국과 공존할 수 없다. 대기업이 서민경제 잡아먹는 괴수가 아니라, 국민경제를 이끌어 가는 본연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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