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글의 의미는 '민족' 보다는 '민권'…『한글민주주의』

한글민주주의/최경봉 지음/책과함께 펴냄

2003년 학계에는 "일제가 우리나라 영문 국호를 'Corea'에서 'Korea'로 바꿨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우리 국호가 처음 서양에 등장한 13세기 이후 700여 년간 공식 국호는 'Corea'였지만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이후 모든 영문 국호를 'KOREA'로 변경했다는 것. 그 이유는 'Japan'보다 'Corea'가 알파벳 순서상 먼저 오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도 붙었다. 이 같은 주장은 반일 감정을 타고 급속도로 확산됐다. 지금도 올림픽 등 국제행사가 열릴 때면 영문 국호를 'Corea'로 바꾸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한글민주주의'는 이 같은 '일제 조작론'이 국수주의적 태도라고 반박한다. 일부 자료를 근거로 단정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우리 국호는 프랑스어 표기인 'Coree' 혹은 'Corea'로 처음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독일어식 표기에 따르면 코리아는 'Korea'로 쓰인다. 19세기 이후 자료의 영문 국호는 두 가지 표기가 뒤섞여 있고, 'Korea'의 빈도가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더구나 1903년 이전에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우표도 대부분 'Korea'를 사용하고 있고, 오히려 1903년 이후 발행한 우표가 'C'와 'K'를 혼용하고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발간된 국내 신문에서도 'Korea'가 일반적이다. 해방 이후에도 남북한 모두 자연스러운 관례에 따라 영문 국호를 'Korea'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원칙인 민권'자주'평화를 키워드로 근대 초기 국어 정책이 어떻게 민권을 향상시켰으며 국어 정책과 교육이 사회의 민주적 의사 소통을 어떻게 원활하게 했는지 살펴본다. 또 통일국가를 꿈꾸는 다문화사회에서 앞으로 국어 정책이 어떻게 가야할지 대안도 모색한다.

한글학자인 저자는 '한자를 쓰면 안된다', '외래어는 고유어로 바꿔야한다', '자랑스러운 한글을 세계로 수출하자'는 식의 논쟁은 언어 문제가 언어가 아닌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로 변질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글은 민족의 자주성과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언어민족주의'가 강하게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글이 없다면 우리말도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혹은 '한글이 없다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왜곡된 인식을 낳았다.

또 한글과 우리말, 우리 민족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보는 민족주의적 관점이 국어학이나 국어정책론에 깊이 스며들면서 맞춤법과 표준어, 외래어 등에 대한 강박과 집착에 빠졌다. 국민 실생활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표준어 대접을 받지 못한 '짜장면', '먹거리', '허접쓰레기' 등 39개의 단어가 지난해에야 표준어 반열에 오른 게 좋은 예다.

때로는 언어민족주의는 한글제국주의로 변질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논란은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사업이다. 독자적인 언어가 있지만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이 부족 문자로 한글을 채택했다는 게 골자였다. 국내 여론은 "한글의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쾌거"라며 열광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애초에 실현 가능성 자체가 낮았다. 국가의 공식 문자는 국어 정책의 틀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민족 국가의 경우 고유문자가 있는 소수민족은 그 고유문자를 사용하고, 문자가 없을 경우 공통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민족어를 표기한다. 이는 국가 전체의 소통의 편리성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어문 정책을 무시하고 한글이 찌아찌아족의 공식 문자가 될 수는 없는 셈이다. 더구나 한글 보급과 한국어 보급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타국 국민에게 외국어가 아닌 공식어로서 한국어를 수출한다는 건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다. 저자는 "문자 선택에도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언어는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편리성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의 몫이며 어문정책은 대중의 요구를 반영해서 발전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280쪽. 1만3천원.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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