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여전히 찌는 듯 무덥다. 평지를 잠깐 걸어도 금세 잔등에 땀이 밴다. 한 아주머니가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어깨와 손에는 배달해야 하는 우유가방이 들려 있다. 한 층, 한 층 걸어 올라가며 우유를 넣는다. 숨은 턱밑에 차오르고 땀은 비 오듯 한다. 무릎은 저리다 못해 감각이 점점 둔해져 간다.
14층, 아직 까마득하다. 그래도 배달을 다 끝내야 한다. 빨리 끝내고 다음 또 다른 아파트로 건너가야 한다. 아이들 학비랑 집 월세를 내려면 14층이 아니라 30층이라도 올라가야 한다. 무릎이 저리고 쑤셔도, 숨이 막히고 진땀에 젖어도 올라가야 한다. 그 아주머니뿐 아니다. 신문 배달 청년도 택배 아저씨도 이 염천에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의문이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될 텐데 왜 계단을 걸어 올라가?'
우유 배달 아줌마, 신문 배달 청년이 그걸 몰라서 계단을 오르는 게 아니다. 엘리베이터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며 엘리베이터 입구에 '배달사원 승강기 사용금지'라는 '경고문'을 써 붙여 놨기 때문이다. 배달원들은 대부분 서민층이다. 새벽부터 남의 집 돌며 우유, 신문 배달하는 힘든 일을 부자가 할 리는 없다. 도대체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전기료가 얼마나 더 나오기에 '경고문'까지 써 붙였을까. 그 아파트 주민들도 살기 어려운 서민들이면 또 조금은 달리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탑승금지' 경고문을 써 붙인 아파트는 서울 강남 부자 아파트로 소문난 A아파트, 30평짜리도 8억~10억 원이 넘는다는 아파트다. 그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배달원에게는 '전기료 아까우니까 14층까지 걸어 다니라'고 했다. 서민배달원들이야 30℃의 무더위에 땀으로 목욕을 하든 말든 무릎이 저리든 말든 내 집 전기료 몇 푼만 금쪽 같이 아깝다는 심사들이다.
부자 아파트의 차가운 경고문을 보며 가족의 생존을 위해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는 배달원들의 가슴을 짚어보라. 지칠 대로 지친 무릎보다 마음이 더 아려와 눈물이 복받칠 것이다. 매정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이기주의는 이 무더위 속 우리 공동체의 실제 상황이었다. 이것이 과연 정의사회, 복지사회를 지향한다는 소득 2만 달러 국가의 시민의식 모습인가.
세칭 일부 강남 아파트 부자들은 천정부지 미쳐서 오른 집값 덕에 불로(不勞) 부자가 된, 말 그대로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지방에서는 문제가 된 A아파트보다 더 나중에 지은 아파트도 2억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10억을 가졌으면 비록 졸부라도 다섯 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은 가져야 이치에 맞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살고 있다. 비정한 사람들이다. 가진 자의 욕심과 비정함에 상처받은 저소득계층 부모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아픈 무릎을 주물러주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또한 그 아파트의 자식들은 덜 가진 계층에게 비인간적 홀대를 하는 부모를 보며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들이 상반된 처지에서 자라나 한 공동체 속에 섞였을 때 과연 더불어 사는 사회의 평화가 유지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인가.
제 자식이 유흥가에서 몇 대 맞았다고 회사 부하직원들을 동원해 남의 자식에게 보복 폭력을 행사한 재벌 총수도 부자의 오만만 있었지 더불어 사는 정신이 없었다. 지난주 그 재벌 총수는 또 다른 죄목으로 법정 구속됐다. 부자동네 아파트 계단에서는 서민의 무릎이 짓이겨지고 탈세한 재벌 뱃속에는 '사회공헌한 재벌을 감히 처벌해?'라는 오만이 퍼져 있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반심(叛心)이 잉태된다. 좌파가 좋아서가 아니라 보수우파 부자들의 탐욕과 비정함, 오만이 싫어서 등 돌리는 게 반심이고 일부 재벌. 부자들의 이기적 비정함이 반심 계층 양산(量産)의 주범인 것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했듯이 나의 부(富)를 평화롭게 누리려면 더불어 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더불어 사는 평화가 무너지면 묻지마 살인이 10년 새 5배나 늘어나는 어지러운 세상이 된다. 세상이 더 뒤집어지면 엘리베이터 전기료 모아 사둔 장롱 속 금 두꺼비가 평양으로 실려 가는 수가 있다. 비정한 서울 부자들이여 두렵지 않은가. 여'야의 대선 공약이 왜 포퓰리즘으로 흐르는가. 복지도 있겠지만 반심의 세상이 될까 두려워서다.
무더위에 계단을 오르는 내 이웃의 아픈 무릎과 눈물을 생각 못하는 이기적인 부자, 그들이야말로 종북 세력보다 더 위험한 반심계층 양성 집단이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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