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임진년(壬辰年)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올해로 칠갑(七甲)자 420년을 맞는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은 조선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조상의 손길이 묻은 문화재가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국난을 통해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 가운데 황악산 직지사에서 출가해 주지까지 지낸 사명대사의 업적은 백미(白眉)다. 사명당은 전란 와중에는 의승병을 이끌고 왜병을 물리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사절단을 이끌고 적지인 일본에 들어가 당시 일본 수도인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담판을 짓고 잡혀간 포로 3천500명을 구출해 돌아온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은 12차례 통신사가 왕래한다. 300년간 양국의 평화가 유지되는 초석이 된다. 임진년을 맞아 사명당의 일본에서의 '구국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광복절이 며칠 지난 20일에 부산과 대마도를 연결하는 쾌속선에 몸을 싣는다. 올해 광복절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양국 외교 관계가 경색되는 등 다소 어수선하다. 20일은 1604년 환갑을 넘긴 연로한 사명이 어명을 받아 범선 8척에 몸을 싣고 기약 없이 대마도로 출발한 날이다. 사명은 6월 22일 서울에서 선조를 알현하고 일행들과 부산으로 내려와 다대포에서 배에 올랐다. 당시 사명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근래로 쇠잔해 가는 머리털 해마다 더 흰데(邇來衰髮遂年華)/
또 남쪽 바다에 8월의 뗏목을 띄웠네(又泛南溟八月사 (뗏목 사 :木부에差)/
팔 굽히고 허리 꺾는 일이 내 본뜻이 아닌데(曲臂折腰非我意)/
어찌하여 머리 숙여 원수 집에 들어가는가(奈何低首入讐家)
사실 사명은 왕명으로 화친사절을 이끌고 대마도로 갔지만 주목적은 일본의 정세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대마도)은 조선과 강화를 수차례 요청하고 뒤로는 강화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침범하겠다는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은 침략자 일본과의 강화는 내심 싫었지만 일본의 위협처럼 다시 왜병이 쳐들어올 경우 나라 형편이 어려워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이 정말 재침할 의사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명을 일본으로 보낸 것이다. 조선 조정은 사명이 실질적으로 사절단을 이끌게 했지만 조정에서는 절충장군 손문옥을 동행시켰다. 조선 관리 중 어느 누구도 적지인 일본에 가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울산 서생포 회담에서 명성을 떨친 사명에게 짐을 맡긴 꼴이다. 더구나 나중에 전쟁의 책임 문제와 함께 전쟁 후의 외교 주도권을 염두에 둔 조정의 처사로 이들은 국서도 지참하지 않았다. 대마도주에게 전할 예조의 서계만 지참했다. 공식사절단이라기보다는 사행(私行) 형식에 가까운 파견이었다. 더구나 사명은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다가 발길을 돌려 일본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조선 백성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 부산항 국제여객선터미널은 우리나라 사람들로 북적인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대마도 여행을 떠나거나 낚시를 즐기러 가는 한국 사람들이다. 오전 8시 쾌속선이 부산항을 벗어난다. 부산항을 벗어나자 곧바로 망망대해다. 뱃전으로 파도가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갈매기 몇 마리가 따라오더니 배웅하고 돌아간다. 이른 아침 바다에는 희뿌연 해무가 끼여 멀리 바라볼 수 없다. 날씨가 청명한 날은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인다. 대마도에서는 한국의 휴대전화가 터지는 곳도 있다고 한다. 40여 분을 갔을까. 벌써 대마도가 눈에 들어온다. 대마도는 부산과 불과 49㎞ 거리이나 일본 본토와는 147㎞나 떨어져 있다. 정말 지척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먼 나라 일본이다. 제주도'울릉도보다 훨씬 가깝고 오가는 배 편수도 더 많다. 이래서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를 한국 땅이라고 돌려달라고 했는가 보다. 역사적으로도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교역도 일본보다 조선과 더 많이 했다. 조선에서 쌀 등을 도와주지 않으면 대마도 주민은 살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한국의 관광객이 없으면 대마도의 경제는 어려워진다고 한다. 배는 섬 해안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부산항을 떠난 지 1시간 50분 만에 목적지 이즈하라항에 도착했다. 사명은 이곳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
배에서 내려 내친김에 바로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을 찾았다. 역사민속관은 쓰시마시청과 이웃하고 있다. 항구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역사민속관 길 입구에는 고려문(高麗門)이라는 현판을 단 한국식 전각이 있다. 에도시대(1600~1868)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기 위해 만들어 '고려문'이라고 했다. 지금의 건축물은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989년 복원했다고 한다.
역사민속관에 들어서 사명대사와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돌아온 답이 실망스럽다. 사명대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역사자료관 안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전시돼 있다. 두루마리 형태로 길이가 14m에 이른다. 이곳은 한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매년 8월에 열리는 '쓰시마 아리랑축제'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되고 있다고 전한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려 사명이 쓰시마섬에서 머물렀던 세이산지(西山寺)를 찾았다. 사찰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있었다.
민속자료관에서는 10분 거리다. 절은 조용하다. 사전에 방문을 요청한 덕분에 다나카 세코(田中節孝) 주지가 반갑게 맞아 준다. 그에게 사명이 세이산지에 머물며 남긴 유묵이나 자료를 부탁했었다. 그런데 기대는 무너졌다. 사명에 대한 어떤 자료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사명에 대해 생소해하는 눈치다. 동행한 계명대 이성환(55'일본학과) 교수가 사명에 대해 설명하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명'이 아니라 '송운'(松雲)이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명당(대사)'유정 스님이라 부르지만 여기서는 송운 스님으로 주로 통한다.
그러나 호칭이 문제가 아니다. 1890년 사찰 화재로 모든 자료들이 불에 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절은 1512년에 '다이니치지(大日寺)'로 세워져 세이산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통신사들은 이곳을 숙소로 이용했다. 임란 전 통신사로 온 김성일과 황윤길도 이 절에 머물렀다. 사명도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명의 유품이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 법당에는 이곳에서 교토까지 사명을 수행한 당시 이 절의 주지 겐소(玄蘇)에 대한 편액이 걸려 있어 그에 관해서도 물었지만 어떤 자료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절 마당에 나오니 한쪽에 선조 때 통신사로 왔던 학봉 김성일의 시비(詩碑)가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이 몇 년 전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만감이 교차한다. 문득 역사에 회자되는 말처럼 당쟁에 휩싸이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찌 됐을까. 진한 아쉬움이 가슴 가득하다. 이때 주지 스님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 중턱에 다른 통신사 비석이 있다고 알려준다. 어렵게 찾아간 곳에는 통신사 황윤길의 현창비(顯彰碑)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해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는 "일본의 침략을 예측하고 왕에게 대비책을 강구했으나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두 자루를 가져가 바쳤으나 무용(無用)이 되었다. 당파싸움으로 인한 국정파탄을 교훈 삼고 왕에게 직간하여 무기까지 준비한 애국충절을 길이 현창(顯彰)코자 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다. 만시지탄이다.
황윤길 현창비를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오면 항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제 비구니가 세웠다는 수선사(修善寺)가 있다. 이곳에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순국지비가 있다. 면암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항일의병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직접 의병을 모집, 임병찬 등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16개 항의 조목을 들어 일본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에 패해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면암은 이곳에서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하다가 병을 얻어 1907년 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면암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르고 부산항으로 이송됐다. 1986년 한일 양국에서 뜻을 모아 선생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마침 선생의 비석 앞에는 무궁화가 30도가 넘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꽃을 활짝 피워 찾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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