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59> 문학평론가 신재기의 의성 교안리 절골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육지 속 오지…나는 산골 촌놈이다

내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처진
내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처진' 육지속 오지'라 불리는 경북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 절골. 열대야도 없는, 한밤엔 별이 쏱아지는 산촌이다. 한여름 땀방울로 일군 형님의 고추밭 가엔 벌써 수수가 알알이 영글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고향을 지키고 계신 형님(신기원.71)과 함께 동네길을 걷는다. 형님은 젊은 시절 내 학업을 뒷바라지 해준 내인생의 후견인과도 같다. 고향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계시지만 내겐 자랑스럽고 고마운 형님이다.
고향을 지키고 계신 형님(신기원.71)과 함께 동네길을 걷는다. 형님은 젊은 시절 내 학업을 뒷바라지 해준 내인생의 후견인과도 같다. 고향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계시지만 내겐 자랑스럽고 고마운 형님이다.
아내와 함께 나선 고향길. 안평면과 신평면의 경계 지점인 니실재에 신평면의 왜가리 집단 서식지를 알리는 대형 광고판이 고향길을 반긴다.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벌써부터 마음이 푸근해 진다.
아내와 함께 나선 고향길. 안평면과 신평면의 경계 지점인 니실재에 신평면의 왜가리 집단 서식지를 알리는 대형 광고판이 고향길을 반긴다.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벌써부터 마음이 푸근해 진다.
신재기(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신재기(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내 고향은 '경북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 절골'이다.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는 국도를 타거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봉양면 도리원에서 내려 92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안평면을 거쳐 신평면에 이른다. 신평면은 1990년 안사면이 분리되어 나가기 전에는 남북으로 뻗은 산맥 사이로 세 개의 큰 골짜기에 걸친 아주 넓은 면이었다. 지금은 검곡리, 교안리와 청운리로 이어지는 면 소재지 골짜기와 중율리, 덕봉리, 용봉리로 이어지는 중율 골짜기 두 지역으로 이루어졌는데, 500여 가구에 9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가 사는 전형적인 산촌이다. 임야가 85%나 차지하고 농지는 겨우 10% 정도에 불과하니 농촌보다는 산촌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성싶다. 더구나 내 고향 교안 3리 '절골'은 큰 도로에서 한참 산골짜기로 들어가는데, 지금은 10가구 정도가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절골은 옛날 이곳에 절이 있어서 얻은 이름으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산골 중의 산골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나는 '지독한 산골 촌놈' 출신이다.

몇 년 전 한 신문에서 우리나라 10대 오지를 발표했는데, 그중에 신평면이 4위에 속한다고 했다. 객관적인 자료와 기준에 따른 결과이겠지만, 처음에는 어떤 착오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지가 뜻하는 바는 그만큼 현대문명의 편리함과 문화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한테 익숙해서 그 불편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고향이 그렇게 산골 오지 마을이라는 점을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신평중학교에 근무하면 교사들이 근무평점으로 받는 오지 점수가 경북에서 울릉도 다음으로 높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빠른 승진을 위해 신평중학교 근무를 자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오지'라는 이름 자체가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오지'는 단지 객관적인 산골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다. 거친 자연환경에 맞서는 육체적 고통은 오지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일상이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벼랑 끝에 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오지 마을 신평면 교안리 절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문명화된 세계와는 철저히 단절되어 사계절 변화하는 자연 속에 묻혀 살았다. 틈틈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동무들과 산야를 뛰놀았던 철부지 소년은 가끔 교과서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다 운 좋게 초등학교 졸업 1년 후 대구로 유학하게 되었다.

나의 유학생활은 우리 집이 소유한 유일한 논 300평을 팔아 대구시 변두리 돼지우리가 있는 어느 집 문간방에 전세 얻어 자취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해가 1968년이었으니 고향을 떠난 지가 44년이 흐른 셈이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세월 동안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형님이 아직도 고향에 그대로 살고 계신다. 명절 차례나 조상 제사 때, 조상 묘역을 벌초할 때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나는 빠지지 않고 고향을 찾는다. 그것은 어떤 이유나 도리 이전에 내 몸에 밴 생활 습관이다. 굳이 말한다면,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그리고 내 존재 뿌리에 대한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요새는 자동차로 대구에서 출발하여 고향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는다. 1966년 대구에서 고향으로 버스 길이 처음 열린 이후로 고향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도 우리 고향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오일장도 생겼다. 안동과 이어지는 버스 길도 개통되었고, 중앙고속도로가 뚫리고 인접 지방도로가 정비되면서 교통이 아주 편리해졌다. 새로 경북도청이 들어서는 곳까지는 자동차로 20분이면 충분하다. 이제 오지라는 별명은 옛 이름표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 면 공무원, 면 주민, 출향민이 합심하여 이 지역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매년 5월 중율리에서 개최되는 '신평 왜가리 축제'이다. 왜가리는 의성군 군조로서 풍요를 상징하는 길조다. 신평면 중율리 속칭 청학마을에 해마다 1천여 마리의 왜가리 무리가 찾아와 집단으로 서식한다. 그런지가 벌써 50년이 넘었다고 한다. 봄마다 왜가리가 찾아오듯이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이 귀향해서 신평 전체가 북적대는 고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평은 산촌이라 논이 적어 밭농사가 주를 이룬다. 특히 마늘과 고추 농사를 많이 짓는다. 일교차가 커서 품질 좋은 과일이 생산되기도 한다. 하지만 '왜가리 집단 서식지'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내세울 명소나 명물이 없다. 그 흔한 사찰, 석탑, 서원, 고가도 없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태어난 곳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고향 출신으로 이름을 널리 드높인 예술인, 정치인, 기업가도 그리 흔치 않다. 지난 시절 내 고향 사람들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정신적 풍요와 문화적 욕망보다 배고픔을 이기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대부분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청소년기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가 고된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공부의 길을 걸었던 나는 엄청나게 운 좋은 사람이다. 나보고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개천에 용 났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니다. 정말로 용이 된 사람은 고향 떠나 산업현장에서 힘들게 일한 사람이다. 객지에서 끈기 하나로 삶의 터전을 새로 개척해나간 내 고향의 이런 사람들을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 고향 의성 신평 사람들은 의지가 강하고 끈기가 있어 절대로 좌절하지 않는다.

안평면과 신평면 경계 지점에 속칭 '니실재'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다. 나는 고향에 갈 때마다 이 니실재 고갯마루에서 고향 쪽을 바라본다. 내가 다녔던 신평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신평장터와 면사무소 등이 저쪽 멀리 희미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내 시선은 아버지 어머니가 잠들어 계시는 선영에서 멈춘다. 고향 땅으로 들어올 때나 벗어날 때니 이곳을 지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 어머니, 저 또 왔습니다." "저 이제 갑니다. 편히 계십시오"라고 말한다. 어느 시점에 귀향하여 고향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나의 고향 가는 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고향에 남은 사람 대부분은 고령이다. 시골에 계시는 형님 내외도 일흔을 넘겼다. 이들은 고향 지킴이다. 흙과 함께 살면서 고향을 지켜온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라도 자주 고향에 들르려고 한다. 화려한 이름을 가진 곳은 아니지만, 그곳이 내 고향이기에 찾아가고 사랑하는 것이다. 찾아갈 고향이 있고, 고향이 나를 배척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내 인생의 출발점이었던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 절골', 나는 내 고향인 이곳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산골 오지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신재기(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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