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거 복숭아 다 먹었나? 더 보내줄까? 애들은 다 괜찮제? 그래, 항상 조심히 다니거라."
오늘 아침 청도에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시아버님의 전화 끝인사는 늘 '항상 조심히 다니거라'입니다. 타향에 살고 있는 자식들과 동생들 안부가 늘 걱정거리입니다. 주말에 들르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내고 생각해보니 제가 참 초심을 잃고 살아가고 있구나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버님과의 첫 만남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습니다. 첫 만남은 남편과 교제를 시작하려던 무렵 우연히 들른 청도 시골집에서였습니다. 남편에 대한 감정도 그리 깊지 않았던 터라 별생각 없이 지나치듯 들른 터였습니다.
때마침 김장을 도우러 오신 작은아버님 내외와 산후 조리하러 내려온 시누네 가족까지 식구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신붓감을 첫선 보이러 데려온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어 버렸습니다. 남편이 그때 갑자기 청도 방향으로 핸들을 돌린 것에는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시 눈을 돌려 훑어보니 어른들 모두 인상이 참 좋으셨습니다. 찻상 앞에 잠시 앉으셨던 아버님은 "고향이 어디냐, 부모님은 건강하시냐" 단 두 가지를 물으시고는 "말씀 나누이소"라는 말만 남기고 밖으로 휙 나가버리셨습니다.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실 것 같았는데 '휙' 나가버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요. 그 순간 저는 마음이 확 기울었습니다. '참 소탈하고 멋있는 분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느낌은 아버님도 마찬가지셨다고 합니다. 며느릿감이 될지도 모를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그날 이후 아들한테 사진을 갖다 달래놓고 매일 밤 들여다보셨다고 합니다. 어머님과 시누가 '뭘 그리 들여다보냐'고 질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친척 결혼식차 대구에 들르신 아버님과 두 번째 만났습니다. 아버님은 "우리 집에 시집오면 아무 걱정 없심다. 형제들 다 착하고 화목하게 살림 잘 꾸려 살고 있으니 집안 분위기는 자신 있습니다" 하시고는 허허 웃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그런 그 말이 그땐 어찌나 믿음직스럽게 들리던지요. 어떤 달콤한 프러포즈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저런 아버님 밑에 자란 아들이라면 참 괜찮은 사람일 것 같다는 쪽으로 남편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게 굳혀졌습니다. 얼마 뒤 결혼을 했고 저는 아버님의 며느리가 됐습니다. 결혼 후에도 아버님은 저만 보면 말씀 없이 흐뭇한 웃음을 지어주셨고 저는 그런 아버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가까이서 지켜본 아버님은 생각보다 약한 분이셨습니다. 집안에 큰일이 있어도 큰 목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동생들, 자식들 의견을 따르셨습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래 자란 저로서는 답답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그 이유를 일평생 당신 주장 한 번 못 세우고 사신 탓이라고 설명해줬습니다.
당신이 회갑을 넘길 때까지 부모님을 모셨기에 무조건 그분들의 의견을 따르셨다고 합니다. 그저 묵묵히 농사일을 해서 자식 넷과 여섯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출가까지 시키신 겁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농사일이 싫어서 젊은 시절 단 한 번, 객지로 일자리를 구해 나갔다가 '장남이 고향 땅을 지켜야 한다'는 할아버님의 부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 뒤론 당신 자식들에게는 농사일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걸 목표로 이를 악물고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덕에 남편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구로 유학을 왔습니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다 보니 사춘기 시절 잠시 방황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즈음 어느 날 잠시 대구에 올라오신 아버님이 남편 손에 5천원을 쥐여주고 가셨는데 그때 잠시 잡았던 아버지의 손이 너무나 딱딱해서, 그 딱딱한 손의 기억 때문에 남편은 어긋난 길을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은 손톱에 늘 투명 매니큐어를 바르셨습니다. 나이 든 남자분이 왜 바르실까 생각했는데 손가락 마디마디에 못이 박이고 손톱이 자꾸 들려 올라가서 매니큐어라도 발라야 손톱이 들뜨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하기 싫어 몸서리치셨다던 농사일을 칠순에 다다른 요즘까지도 쉼 없이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아픈 몸을 놀려 수확한 과실과 곡식들은 객지에 있는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보내주기 바쁘십니다. 사회생활하는 며느리의 친구 몫까지 챙기십니다. '내 며느리를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면 내가 선물해야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부모님이 바로 살아있는 부처'라는 말을 가슴에 되새기며 잘해야지 하다가도 순간순간의 이기심 때문에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아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저 이렇게 아이들 키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도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작은 위안을 해봅니다.
임언미/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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