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채널] '기존 봉건체제 깨트리자' 150년 전 진주농민항쟁의 기록

KBS1 '역사스페셜' 30일 오후 10시

수탈과 탐학의 수렁에 빠진 조선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조선 최대의 민중혁명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진주농민항쟁'. KBS 1TV '역사스페셜-진주농민항쟁 150년 기획' 편이 30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1862년 한 해 동안에만 전국 71곳에서 농민들이 난(亂)을 일으켰다. 경남 진주는 그해 봄에 처음으로 난이 시작된 곳으로 이후 민란의 기운은 경상도를 넘어 전라도, 충청도로 삽시간에 퍼진다. 그렇다면 유독 1862년에 그 많은 민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시작은 왜 진주였을까.

진주 농민의 거센 기세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안핵사 박규수를 진주로 급파한다. 당시 진주농민항쟁의 발생부터 수습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진양초변록'에서 박규수의 수사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 박규수는 민란의 배후로 '홍문관 교리' 출신인 유력 사족 이명윤을 지목한다. 그뿐 아니라 당시 지배층에 속했던 양반들도 농민시위대에 합류한다.

진주농민항쟁 1년 전인 1861년, 경상우병사 백낙신이 진주로 부임한다. 수십 년간 지속한 삼정의 문란과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최고조로 누적된 상황에서 백낙신의 지나친 학정과 세금 수탈이 진주농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다.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고심책을 내놓는데 그 결과물이 삼정운영의 개혁안을 담은 '삼정이정절목'이다. 이 개혁안은 당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일정 부분이 반영된다. 이로써 진주농민항쟁은 기존 봉건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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