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 언덕길을 20분쯤 걸어 내려가다 보면 극장이 하나 있었다. 요즈음 말로 영화관이라고 하지 않고 극장이라고 하는 것은 딱히 영화만을 상영했던 것이 아니라 가끔은 가수들과 코미디언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거나 재담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극장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늘 선망의 대상이었던 장소였다. 그 극장은 동시상영관이었는데 이미 개봉한 영화 두 편을 연속해서 보여주었다. 사실 그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대부분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었지만 우리는 몰래 그 영화관에서 이소룡(Bruce Lee, 1940~1973)과 왕우(Wang Yu, 1944~)를 만났고 박노식과 율 브리너를 만났다. 그들은 어둡고 냄새나는 극장 안에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영사기에서 뛰어나와 수십 명의 악당들을 혼자서 물리치곤 했었다. 형편없는 화질에 걸핏하면 화면에 비가 내리고 필름이 끊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들은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별로 재미가 없던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다시 기다리던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우리는 그 긴 시간 내내 이소룡을 기다렸다.
그 당시만 해도 남자 아이들에게는 신성일은 인기가 없었다. 그는 여자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적어도 사내라면 사랑놀음 따위보다는 정의여야 한다는 것이 사내아이들의 불문율이었다. 중학교 이학년쯤으로 기억한다. 골목마다 '별들의 고향'이란 영화포스터가 붙었다. 여주인공 안인숙이 상체를 살짝 가리고 신성일을 끌어안고 있는 영화포스터는 막 성징(性徵)이 나타나고 있는 사내아이들에게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숙한 아이들은 이미 보았노라고 큰 소리를 치고 다녔고 소심한 아이들은 그저 교실 뒤에서 영화를 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영화의 내용이나 배우들의 연기보다는 오히려 단속을 피해 극장에 들어간 호기어린 영웅담이 전부였다. 아무튼 '별들의 고향'은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남녀 주인공들의 대사와 키스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일처럼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던 가수 이장희가 만든 영화음악 때문이었다. 특히 성우의 내레이션이 들어가 있는 노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아이들도 항상 따라 부르던 당대의 히트곡이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그댈 위해서라면/나는 못할게 없네/별을 따다가 그대 두손에/가득 드리리/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나 그대에 모두 드리리 중에서)
영화에 삽입된 이 노래는 사실 이장희의 출세작 '그건 너'와 더불어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친구에게 바치는 노래였다고 한다.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담은 노래 때문이었을까? 그는 첫사랑, 그녀와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란 명목으로 진행된 금지곡 파동과 그에 따른 대마초 파동으로 그는 가요계를 떠나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가 만든 노래가 금지곡이 된 이유는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는 것이 이유였고, '불 꺼진 창'은 창 안에 남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가사가, 불륜을 조장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당시 부정한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 푼어치도 되지 않는 도덕성을 내세워 대중문화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술집 접대부와 가난한 화가의 사랑을 그린 '별들의 고향'이 상영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놀랍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것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면의 칼날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벌써 40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검열과 통제는 그 얼굴을 달리할뿐 여전하다. 산업화의 성공(?)이 그 당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느냐의 논란이 다시금 분분하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는 이 글의 크기가 적당하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오래된 영화의 노래가 기억되는 이유는 단지 그 노래가 과거의 추억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는 다른 색깔로 덧칠한다고 해서 결코 잊혀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전태흥 ㈜ 미래티엔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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