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건배사

건배의 역사는 술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그런데 건배의 유래와 의미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르다고 한다. 딱히 동양을 거론할 것도 없이 우리의 역사를 보면 예로부터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나누어 마셨다.

송강(松江)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와 같은 명시를 보더라도 서로 한두 잔 마실 때마다 꽃나무 가지를 꺾어서 셈을 하며 즐겼다고 하니 조상들의 풍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반면 서양의 경우엔 의심(疑心)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술을 나눠 따라서 동시에 마심으로써 독주(毒酒)가 아님을 확인하는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카르타고 군이 마취제를 넣은 포도주를 로마 병사에게 먹여 전세를 역전시켰던 것이다. 그런 전설이 아니더라도 서양사회는 유목과 교역이 빈번하여 항상 낯선 사람과 공존해야만 하는 이질 사회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겨나는 경계와 불신이 건배의 문화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달랐던 우리의 음주 풍습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변했다. 참석자가 모두 잔을 들면 윗사람이 구호를 붙이고 아랫사람들이 따라하는 군국주의 일본식 건배가 들어오면서 화기애애하게 술을 권하던 풍습은 권위적인 것이 됐다. 거기에다 서구 문명과 함께 밀려들어 온 서양식 건배 문화가 우리의 주도(酒道)와 함께 섞였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건배의 말, 즉 '건배사'다.

지금은 회식장소에 가면 건배사는 아예 음주문화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은 듯한데 들어서 크게 거북하지 않고 인상 깊었던 건배사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먼저 '금'에는 황금도 있고 백금도 있고 일상생활에는 그보다 소중한 소금도 있단다. 그러나 그 모든 금들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지금'인데 바로 지금을 위하여 건배!

다음은 '신'에 대한 얘기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신들이 있단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헤아리기가 힘들었고 그 후로도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등. 그렇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신'은 바로 같이 있는 '당신'이란다. 마주 앉은 당신을 위하여 건배!

그 다음은 말장난 같아서 조금은 엉뚱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라면'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바다가 육지(라면)'이라 답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라면이 있단다. 바로 '우리가 함께(라면)'이란다. 그래서 '우리가'라고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함께 라면!'이라고 화답을 한다.

이렇듯 기억에 남는 건배사가 있지만 나는 그 모두를 합한 건배사가 가장 마음에 든다. '지금' 마주 앉은 '당신'과 '함께라면!' 진실로 그렇다면, 제발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소통과 화합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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