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50>황악산의 일출

새벽 설산서 맞는 장엄한 일출… 이제 산객은 지팡이를 내려 놓는다

황악산 정상에서 본 일출
황악산 정상에서 본 일출
황악산 정상에 핀 눈꽃 코발트색 하늘이 인상적이다
황악산 정상에 핀 눈꽃 코발트색 하늘이 인상적이다

황악산 동쪽 금오산 능선이 붉게 물들더니 한 줄기 흰빛이 빼꼼히 머리를 내민다. 새벽어둠을 뚫고 솟아 나오는 빛은 너무나 강렬하다.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다. 갑자기 솟아오른 해 주위에 구름이 일어나 순간 햇빛을 감추려는 듯하다. 그러나 이내 붉은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운해를 헤치고 비상한다. 머리를 내민 해는 접시를 엎어 놓은 모습에서 이내 반원 형태로 변하더니 곧장 하늘로 솟아올라 둥근 모양을 갖춘다. 조금 더 일출의 여운을 눈에 담으려는 사람들에게 짧은 시간만을 허락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해가 솟아오르자 일순 잔잔한 바람이 일어난다.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며 천지가 개벽을 한다. 황악산 일출은 영하 10℃의 혹한의 추위도 잊을 만큼 짜릿한 흥분의 도가니를 연출한다. 해가 솟아올라 모양을 갖추는 가운데 태양 아래로 빛줄기가 내려 비취는 용오름 현상을 보인다. 장관이다. 황악산 정상에는 며칠간 내린 눈으로 수목들이 온몸을 짓눌린 채 있다가 기재개를 활짝 펴는 모양이다. 이렇게 황악산 정상에서의 하루가 밝았다.

일출을 보기 위해 함께 산을 찾은 하준호(60) 씨는 "눈이 내려 대기가 맑아져서인지 오늘 일출은 그 어느 때보다 붉고 강렬했다"며 "힘차게 솟는 일출을 보니 연말 마무리는 일사천리(황악산 높이 1,111m)로 잘 될 것"이라고 소감을 건넸다.

◆겨울산을 오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이랄까. '대간 숨을 고르다 황악'의 막바지 연재에 다시 산을 찾았다. 며칠 전부터 황악산에는 눈이 내렸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일찍 몸을 일으켰다. 황악산 해오름 맞이를 위해 새벽 5시쯤 직지사를 찾았다. 김천시내에서 직지사에 이르는 도로 곳곳은 눈이 쌓여 길이 무척 미끄럽다. 직지사 입구에 도착하니 추위가 맹위를 떨친다. 수은주가 영하 8도를 가리킨다. 올겨울에 찾아온 가장 추운 날씨다. 일행들과 차에 올랐다. 보통 산행 때는 입구에서 차를 내려 길을 나서는데 이날은 날씨도 고르지 못한데다 행여 산행이 늦어져 정상에서 일출을 보지 못할까 봐 문명의 이기인 승용차 신세를 지기로 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전진한다. 불빛이 닿은 곳은 온통 백색이다. 이곳에는 이달 6~8일까지 3일간 눈이 왔다. 이 때문에 길이고 나무고 모두 흰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직지사 절 모퉁이를 지나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능여계곡과 내원계곡이 만나는 교각을 건너자 차가 가파른 등판길을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할 수 없이 도로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산행에 나선다.

겨울산행은 반드시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특히 어두운 밤 눈길 산행은 더욱 위험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큰일을 당할 수 있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하고 또 발목에는 보호대(스패츠)까지 단단히 준비한다. 영하 10도 추위로 벌써 손이 곱아 작업속도가 느리다. 차를 버려두고 길을 재촉하니 훌쩍 30여 분이 지났다. 500여m를 갔을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빛이 보인다. 운수암이다. 스님들이 벌써 새벽 예불을 마친 모양이다. 법당에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올봄 새벽 시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하다. 아마 개도 추운 날씨에 바깥의 소란스러움마저 외면한 모양이다.

◆칼바람 맞으며 일출 맞이를 향해

운수암을 지나면 오르막 산행이 시작된다. 문득 하늘을 보니 그믐달이 한쪽에 걸쳐져 있다. 음력 26일로 달빛이 많이 바랬지만 그래도 내린 눈이 하얗기 때문인지 시린 달빛이 그나마 길 찾기에 도움이 된다. 어둠 속에서 모자에 두른 전등 불빛에 의지해 앞사람과 보조를 맞춘다. 사방이 조용한데 눈 위에 찍는 발걸음 소리와 산꾼들의 거친 숨소리만 적막을 깨운다. 조금 전진하니 오르막길이 모습을 보인다. 산꾼들은 이 오르막을 깔딱고개라고 부른다. 경사가 급하기 때문이다. 30여 분을 갔을까? 수은주가 영하 10도 아래를 가리키고 입에선 하얀 김이 무럭무럭 뿜어져 나온다. 숨이 턱밑에 걸린다.

산행 시작 30여 분, 산 능선에 올라선다. 백두대간 괘방령에서 오르는 길과 마주한다. 능선을 오르자 서서히 여명이 찾아든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김천시가지가 어둠에서 깨어나며 어슴푸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는 벤치가 있어 산꾼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하지만 행여 정상에서 일출을 놓칠까 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능선길에 오르자마자 복병을 만난다. 칼바람이 전신을 엄습한다. 운수암 등산로는 산 능선 아래에 숨겨져 있어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능선을 오르면 백두대간 영동 쪽에서 불어오는 살을 에는 칼바람의 매서움이 산꾼들을 움츠리게 한다. 여명으로 주변이 밝아지면서 길 찾기가 다소 수월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웬걸, 이번에는 쌓인 눈을 헤치고 가는 길이 예삿일이 아니다. 남쪽으로 부는 백두대간 칼바람은 등산길을 바꿔 놓기 일쑤다. 멀쩡한 등산로를 눈으로 파묻어 알 수 없게 한다. 쌓인 눈은 황악산을 자주 찾던 산꾼들도 길을 잃고 헤매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앞선 자가 낸 길을 뒤따르는 자가 그대로 따른다는 평범한 진리도 본다.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이 넘었지만 어디 마땅히 쉬어 갈 곳도 없다. 황악산에는 며칠 동안 25~27㎝의 눈이 내렸다. 그래서 바람이 몰아쳐 눈이 쌓인 곳은 허벅지까지 눈에 빠진다. 바람을 등진 능선은 그나마 오르기가 덜 힘들지만 바람과 맞선 능선길은 휘날리는 눈보라와 쌓인 눈으로 걸음을 떼어 놓기가 쉽지 않다. 젖 먹던 힘까지 보태 산을 오른다.

그런데 동이 트려는 모양이다. 멀리 금오산 마루금은 점점 붉은빛이 짙어진다. 자칫 정상에서 일출을 놓칠까 걸음을 재촉한다. 아마 겨울 산행 중 특히 눈밭에서 산을 오르기는 평소보다 2배 이상 힘이 들 것이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겐 정말 힘든 산행이다. 그래도 산이 있어 산을 찾는다. 가쁜 숨을 돌리기 위해 한 모금 물을 찾는다. 그런데 가져온 생수병이 혹한 추위에 얼었다. 병마개가 잘 열리지 않는다. 정상에 다다르자 잠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해님이 고개를 내민다. 마치 지금까지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는 듯이 황악산 일출이 다가왔다.

◆아! 눈꽃 핀 황악산

사실 '대간 숨을 고르다 황악'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몇 차례 일출 맞이를 준비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해 첫날에도 산을 올랐다. 하지만 황악산 산신께서 쉽게 일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구름이 낀 날씨 탓에 다음을 기약했다. 어쩔 수 없이 임진년 설날 다시 일출을 맞이하려 했지만 심술을 부려 해를 내어주지 않아 또다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오늘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황악산신께서 일출 장면을 허락해 준 것에 감사한다. 어쩌면 오늘 일출을 보려고 산을 찾은 것은 다소 무모했다. 맑은 날에도 운해 등으로 인해 정상에서 제대로 된 일출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더구나 어제까지 연일 눈이 내렸다. 어두운 새벽에 눈 쌓인 산을 오르기가 어디 만만한가.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그 기쁨은 더 큰 법이다. 산행을 마무리하면서 황악산 정상에서 일출을 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즐거움도 잠시, 해는 곧 중천으로 떠오른다. 산을 연재한 지난 한 해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눈을 들어 백두대간 마루금을 바라본다. 하얀 눈 속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대간의 숨소리를 음미한다. 괘방령 북쪽으로 능선길이 보이고 남으로 형제봉을 넘어 바람재, 우두령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이어진다. 황악산 백두대간을 눈 속에서, 꽃길에서, 우거진 녹음에서 걸었었다.

눈을 들어 서쪽을 내려다보니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 '지통마 마을'이 보인다. 영화 '집으로'의 촬영지인 오지마을이다. 황악산이 김천과 영동을 아우르고 있어 영동 상촌 쪽으로 오르는 등산로도 한번 찾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질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황악산 정상은 칼바람과 몰아치는 눈보라로 정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한다. 정상에 머물면 언젠가 내려와야 하는 것이 인생사의 이치다. 눈을 들어 눈꽃이 핀 겨울 산의 아름다움을 눈에 가득 담는다. 오늘에야 산악인들이 눈 덮인 황악산에 대해 왜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글'박용우 특임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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