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생의 뿌리-구석본

오월의 비슬산 숲에 들어가면

물푸레나무, 때죽나무, 상수리나무

그 사이사이에 이름 없는 일년생 풀잎들이

푸른빛을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 올리는데

푸른빛의 뿌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지난 가을 혹은 그 전 해의 가을, 더 먼 가을날

하릴없이 바람에 흩뿌려진 낙엽이다

켜켜이 쌓여 밑에서부터 조금씩 썩어가며

푸른 잎을 밀어올리고 있다

잎들이 등걸을 타고 하늘로 기어오를 때마다

낙엽은 조금씩 부스러지며 흙 속으로 스며든다

한때, 서로 다른 잎의 넓이와 빛깔을 지우고 부스러져

물푸레나무, 때죽나무, 상수리나무

그 밑으로 일년생 풀잎들을

세상으로 세상으로 밀어올리고 있는

지난 가을의 낙엽들,

부스러지며 뿜어 올리는 생의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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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통찰한다는 점에서 과학자와 닮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찰을 증류수와 같은 추상적인 공식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냄새와 빛깔을 지닌 것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비슬산에서 서로 다른 나뭇잎들이 제 모습과 빛깔을 지우고 부스러져 일년생 풀잎을 키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지난 세대가 새로운 세대의 토양, 즉 '생의 뿌리'라는 통찰을 읽어냅니다. 낙엽 빛깔과 흙냄새가 묻은 통찰입니다.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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